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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시개조론-내신을 바꿔야 학교가 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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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2732) | 추천 (0) |점수 (0) | 2008-11-17 15:57:47 이기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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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jpg, 입시제도.pn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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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균 70점의 딜레마
학교 시험은 대략 70점의 평균 점수를 지향한다. 지금의 내신제도에서 평균점수를 70점으로 하는 것은 매우 적절하다. 평균점수를 이보다 너무 낮게 하거나 너무 높게 하면 적지 않은 문제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평균 70점이란 점수에서도 교사들은 어떤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교사가 아무리 몸부림쳐도 다음의 세 가지 잘못 중 하나는 반드시 저지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첫째. 평균 점수를 70점 정도로 하면 절반 정도의 학생은 70점 이하의 점수를 받는다. 그런데 학생들이 70점 이하의 점수를 받는다는 것은 학생들이 교사가 가르친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는 걸 의미한다. 즉 절반 정도의 학생들이 교사의 수업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다. 결국 교사가 수업을 잘못한 것이다. 교사가 수업을 제대로 했다면 절반이나 되는 학생이 70점도 안 되는 시험 점수를 받을 수는 없는 것이다. 지속적으로 70점도 못 받는 학생들이 공부에 의욕을 가지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이 학생들은 좌절하고 절망해서 아예 공부를 포기할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학교에서는 많은 학생들이 공부를 포기하고 있다.
둘째. 교사의 수업 능력에 아무 문제가 없다면, 학교에는 교사의 수업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할 정도로 실력이 모자라는 학생들이 많다는 얘기가 된다. 그런데 이것은 학생들의 잘못이 아니다. 학생들의 실력이 모자라면 모자란 수준에 맞추어 수업하는 것이 교사의 의무이다. 결국 교사가 학생들을 잘못 가르친 것이 아니라면 교사는 대부분의 학생들이 감당할 수 없는 어려운 내용의 수업을 한 것이다.
셋째. 이것도 아니라면 교사는 시험을 지나치게 어렵게 출제한 것이다. 수업과 유리된 지나치게 어려운 시험 문제를 출제하여 학생들의 점수가 낮게 나온 것이다. 이런 경우 학생들에게 공부에 대한 좌절감만을 심어 줄 수 있으니 이 또한 교사의 잘못이다.
지금의 내신제도에서 학교 교사는 위의 세 가지 잘못 중 어느 하나는 반드시 저지르게 되어 있다. 지금의 내신제도에서는 교사가 잘 가르쳐서 학생들의 실력을 향상시키는 것이 애초부터 이론적으로 불가능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모든 학생이 시험을 잘 보면 다시 문제를 어렵게 출제해서 평균을 떨어뜨려야 한다. 평균 70점이 교육청의 권장 사항이라서만은 아니다. 학교시험 성적이 그대로 대학 입학시험 성적으로 작용하는 이상, 시험은 변별력을 가져야 하기 때문이다. 평균 점수가 너무 높아서는 변별력을 가질 수 없다. 변별력을 가지려면 평균 점수가 적당히 낮아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변별력을 갖기 위해 시험을 어렵게 내면 상당수 학생들은 공부에 흥미를 잃게 된다. 아무리 공부해도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어려운 문제가 출제되어 점수가 나오지 않는데 학생들이 공부에 흥미를 갖는다면 오히려 그것이 이상한 일이다.
학생들에게 자신감을 심어주려면 시험문제를 적절히 쉽게 내야 하는데 그러면 더 큰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바로 변별력의 상실이다. 게다가 시험 문제가 쉬워버리면 상위권 학생들에게 학교시험은 서로의 공부 실력을 겨루는 경쟁이 아니라 문제 풀 때 실수 안 하기 경쟁이 되어버린다. 이렇게 되면 학생들은 자신의 재능을 진짜 실력을 키우는데 쓰지 못하고 반복적인 문제풀이 훈련에 사용하게 된다. 똑똑한 학생들의 재능이 너무 헛되이 낭비되어 버린다. 이런 저런 문제를 생각해보았을 때 지금의 내신제도에서 학교시험은 평균 70점을 지향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평균 70점인 시험에서도 많은 학생들은 자신감을 잃고 있고 반면에 다른 많은 학생들은 자신의 재능을 반복적인 문제풀이 훈련에 낭비하고 있다.
이것은 학교시험이 그대로 입시의 일부로서 존재하는 지금의 내신제도에서는 결코 벗어날 수 없는 딜레마이다. 내신제도로 인해 교사들은 결국 학생들이 잘하면 다시 못하게 해야 하는 비극적 운명을 타고난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다.
학교 수업은 현대판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
우리나라의 학교 수업은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와 같다. 무슨 말인가? 고대 아테네의 악당 '프로크루스테스' 는 밤길을 지나는 나그네를 집에 초대하여 잠자리를 제공하는데, 그 잠자리라는 것이 곧 딱딱하기 이를 데 없고 차갑기가 얼음 같은 쇠로 만든 침대였다. 나그네를 강제로 침대에 묶은 그는, 나그네의 몸길이가 침대보다 짧으면 몸길이를 늘려서 죽였고, 몸길이가 침대보다 길어 침대 밖으로 몸이 나오면 그 나온 부분을 잘라 죽였다. 그 침대와 몸길이가 똑같은 사람만이 그로부터 목숨을 건질 수 있었지만, 사실 그런 경우는 거의 드물 수밖에 없었다.
지금 대한민국의 학교가 학생들에게 하는 일은 '프로크루스테스'가 사람들에게 저지른 일과 정확히 일치한다. 대한민국 학교가 학생들에게 제공하는 침대는, 즉 수업은 사실상 단 한 종류이다. 학교가 제공하는 수준의 수업에 맞지 않는 학생들은 그냥 고통을 당해야 한다. 수업이 너무 시시하게 느껴질 정도로 공부를 잘하는 학생도, 수업이 너무 어렵게 느껴지는 공부 못하는 학생도 모두 고통을 당해야 한다.
학교는 학생들이 수업시간에 어떠한 고통을 당해도 학생들의 능력에 따른 다양한 침대를 제공하지 않는다. 키가 크면 키를 줄일 것을 요구하고 키가 작으면 키를 늘릴 것을 요구할 뿐이다. 학생들이 가진 능력을 오직 주어진 수업에 맞추도록 강요할 뿐이다. 대한민국 학교수업은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인 것이고 대한민국 학교는 학생들의 다양한 수준과 취향을 무시하고 오직 단 하나의 ‘수업’만을 제공하는 '프로크루스테스'인 것이다.
학교개조론에서 얘기했듯이 학생에게 필요한 것은 고등학교 단계의 수학수업이 아니라 중학교 단계의 수학수업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고등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중학교 단계의 수업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런데 고등학생 중에는 고등학교 수학과정을 정상적으로 따라가지 못하는 학생이 결코 소수가 아니다. 그런 학생들은 상당히 많다. 나의 경험하나를 얘기한다.
학교시험 기간 중의 일이었다. 그 날 나는 수학 시험 감독으로 들어갔다. 그날따라 많은 아이들이 시험이 시작한지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도 엎드려 잠을 자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시험이 시작한지 10분이 갓 지났을 때 나는 자는 아이들의 숫자를 세어 보았다. 32명 중 8명이 엎드려 있었다. 25%의 아이들이 시험지를 받자마자 이름 쓰고 정답을 아무렇게나 찍은 뒤 엎드려 잠을 청하는 것이었다. 이 아이들은 최근 2달 동안 배운 범위에서 출제되는 문제를 단 한 개도 풀지 못한 채 엎드려 잠을 청한 것이었다. 아니 단순히 못 푼 게 아니라 한 개의 문제라도 풀어보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은 채 시험을 포기했다. 이 아이들의 수업 시간에 어떻게 행동하고 있을까? 한 시간 동안 조용히 교사의 설명을 듣고 있을까? 아니,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는 수업내용을 한 시간 내내 듣는 것이 가능하기나 한 것일까? 결국 참지 못하고 떠들거나 장난을 치지 않을까? 이 아이들이 떠들고 장난을 칠 때 교사는 수업에 집중할 수 있을까?
수준별 수업과 우열반 수업
일반적 의미에서 우열반 수업이란 전체과목이나 중요 과목의 평균 점수로 반을 나누어 고정시켜 놓고 수업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이명박 정부의 자율화정책에는 이러한 우열반 수업을 학교장의 자율에 맡기는 것으로 되어있다. 그런데 이러한 종류의 우열반 수업은 웬만한 사람이라면 반대하는 매우 비교육적인 것이다. 보수우파 언론의 대표인 조선일보조차 이러한 우열반 수업에는 반대하고 있다.
다음은 이명박 정부의 학교자율화 정책에 반발하는 전교조를 비판하는 내용의 조선일보 사설이다. 외부 필진의 글이 아니라 회사의 공식 입장을 밝힌 사설의 일부이다.
“교육부가 지금까지 중1~고1 영어·수학에 한해 3개 수준 이상으로 반을 편성해 가르치도록 했던 수준별 이동수업을 앞으론 학교가 알맞은 수업방법을 찾아 스스로 결정하도록 하겠다고 하자 "우열반(優劣班) 하자는 거냐."는 비판이 쏟아져 나왔다. 전교조는 "(새 정부 교육정책은) 성적으로 학생을 줄 세우고 학교를 입시 전쟁터로 내몬다"는 성명을 냈다. 일부 좌파 교육단체와 좌파 언론들도 잇따라 들고일어나 초·중·고 일선 학교에 대폭적으로 자율권을 부여하겠다는 교육부 방침에 대해 "교육부가 간섭 안 하겠다는 것은 학교가 우등생 따로, 열등생 따로 모아 차별교육 시켜도 괜찮다는 것 아니냐"고 공격을 퍼붓고 있다. 세상만사(萬事)를 강자와 약자, 약탈자와 피해자, 잘살고 똑똑한 인간과 못살고 못난 인간으로 둘로 나눠 자기들은 약자와 피해자와 못살고 못난 인간의 대변자인 양 떠드는 위선자(僞善者) 버릇이 다시 되살아난 것이다. 좌파들은 이런 계급적 편 나누기의 도사(道士)들이고, 이런 수법으로 매번 큰 재미를 봐 왔다. 학교가 학생 석차를 근거로 '우등생반' '열등생반'을 만든다면 그걸 찬성할 학부모, 학생, 교사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아이들한테 공부가 좀 뒤처진다고 이런 낙인(烙印)을 찍는다면 그건 교육이라고 할 수도 없다.”
조선일보조차도 우등생반과 열등생반을 만들어 수업하는 우열반 수업은 교육이라고 할 수도 없는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수준별 수업이란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수준별 수업은 과목별로 석차에 따라 이동수업을 하는 수업이라고 얘기되고 있다. 교육부가 지금까지 중1~고1 영어·수학에 한해 3개 수준 이상으로 반을 편성해서 가르치도록 했던 이동수업이 바로 수준별 수업이라고 얘기되고 있는 것이다. 우열반 수업은 교육도 아니라며 강력하게 비판한 조선일보가 적극 옹호했던 수업이 바로 이것이다.
이런 종류의 수준별 수업이라면 조선일보가 비판하는 전교조도 굳이 반대하고 반발할 이유는 전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조선일보가 놓치고 있는 것은 지금의 내신제도에서 진행되는 수준별 수업은 엄밀한 의미에서는 수준별 수업이 아니라 과목별 우열반 수업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과목별로 잘하는 아이와 못하는 아이들을 나누어 놓고 똑 같은 수준의 수업을 하고 똑 같은 수준의 시험을 보게 하는 사실상의 우열반 수업인 것이다. 그것은 아이들의 취향과 수준을 고려하는 수업이라는, 본래 의미의 수준별 수업이 아니다. 조선일보가 진실로 수업을 비판했다면 지금의 내신제도에서 진행되는 수준별 수업이라는 이름의 과목별 우열반 수업도 선뜻 찬성해서는 안 될 것이다.
지금의 내신제도에서는 학생들이 모두 동일한 시험을 보아야 한다. 그리고 모두 동일한 교재로 수업해야 하고, 같은 수준의 수업을 받아야 한다. 내신제도 때문에 학생 개개인의 능력 수준에 맞추어 다양하게 수업하는 진짜 수준별 수업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러나 선진국에서는 학생의 능력에 따라 달라지는 진정한 의미의 수준별 수업은 학교 수업이 학교 수업의 기본 형태이다. 조선일보에서 예로 든, 흔히들 교육 분야의 최고 모범 국가로 인정하고 있는 핀란드의 학교 수업만 해도 과목별 우열반 수업이 아닌 온전한 의미의 수준별 수업이다.
물론 그 수준별 수업은 한 교실에서 이루어질 수도 있고 각기 다른 교실에서 이루어질 수도 있다. 핀란드의 경우 초등학교의 수업은 수준별 수업이 한 교실에서 이루어지는 것 같다. 한 교실에서 공부를 잘하는 학생과 못하는 학생이 함께 공부하지만 모든 학생에게 일률적으로 강요되는 수업이 아니라 학생들의 능력 수준에 맞게 수업이 진행된다. 그러나 핀란드의 경우도 고등학교의 경우는 수준별 수업이 각기 다른 교실에서 이루어진다. 고등학교의 경우에는 수업이 학년제가 아닌 단위제로 이루어진다. 학년 자체가 존재하지 않으며, 학생들은 선택한 교과의 단위를 취득하면 되게 되어 있다. 이러한 단위제 수업에서 이수 과목은 학생스스로가 알아서 단위별로 선택하도록 되어있으니 학생은 자신의 능력에 맞는 수업을 선택해 들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수학의 경우 최저 6단위, 최고 11단위를 취득하도록 되어 있는데 수학에 자신이 없는 사람은 상대적으로 내용이 쉬운 6단위만 들어도 된다. 요컨대 학생들이 자신의 능력 수준에 맞는 수업이 가능함을 제도적으로 보장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학년 자체가 존재하지 않으니 졸업도 학습 속도가 빠른 학생은 2년 만에, 더딘 학생은 4년 만에도 졸업할 수 있다. 학생의 능력에 따른 수준별 수업은 기본이고, 학생들이 자신의 능력을 고려하여 졸업 시기까지 자유로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이다.
미국 학교의 경우도 수업의 기본 형태는 수준별 수업이다. 미국에서 자녀를 키운 적이 있는 사람의 경험담을 들어보자.
한국에서 수학과 과학을 포기했던 작은 아이는 미국에서 7학년 때 비교적 쉬운 과목을 듣고 좋은 성적을 받을 수 있었다. 아이의 7학년 수학성적은 89점이었다. 교사가 편지를 보냈다. 90점 이상이면 우수과목(honor class)을 들을 수 있는데 경계선에 있으니 알아서 선택을 하라는 것이다. 미국에서는 과목을 선택할 때 교사의 조언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성적이 필수는 아니다. 성적은 비록 부족해도 도전의지가 높은 학생에게는 교사가 기회를 주기도 한다. 그래서 능력별 과목이라기보다는 수준별 선택 과목이라는 말이 더 정확하다.
“무슨 내용이야?” 영어편지를 이해하지 못했던 작은 아이가 불안한 표정으로 물었다. “응, 너 수학을 잘해서 선생님이 네가 8학년에는 우수과목 들으면 좋겠대.” “싫어. 그러다가 어려우면 어떻게 해?” “한 번 시도해봐. 작년에도 잘했으니까 선생님이 네가 소질이 있다고 도전을 해보라고 권하시는 거야.” 아이는 불안에 떨면서도 교사의 편지(정확히 말하면 엄마의 무단 해석)가 큰 힘이 되었는지 8학년 때 우수과목을 택했다. 놀랍게도 아이는 반에서 최상위 수준을 했다. 한국에서는 수학이 너무 어려워 못 따라가던 아이가 미국에서 7학년 때 최하위 과목을 듣고 자신감을 회복했던 것이 주효했던 것 같다. 한 번은 시험문제를 모두 맞혔을 뿐만 아니라 보너스 문제까지 맞춰 102점을 받은 적도 있다.
내신제도가 바뀌어야 수준별 수업이 가능하다.
앞에서 얘기한 핀란드나 미국, 호주 학교의 수준별 수업을 우리나라 학교에서는 애시당초 할 수가 없다. 아이들의 다양한 능력 수준을 고려한 수업을 하려면 평가도 아이들의 능력 수준을 고려해서 해야 하는데 내신제도로 인해 그것부터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핀란드의 학교에서는 우리나라 학교처럼 획일적인 평가를 하지 않는다. 학생의 성적을 순서대로 해서 등수를 매기지도 않는다. 핀란드에서는 평가가 존재하는 중학생의 경우도 상대평가가 아닌 절대평가로 이루어진다. 타인과의 비교하여 순위를 매기기 위한 시험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전체 학교를 통합하여 실시되는 통일된 시험 같은 것도 없다.
그러나 전체 학생을 대상으로 실시하는 획일적인 시험은 우리나라 내신제도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다. 이로 인해 학생들의 취향과 능력을 고려하는 다양한 수준의 수업이 애초부터 가능하지가 않은 것이다. 결국 수준별 수업을 가로막는 최대 적이 내신제도인 것이다. 물론 수능시험이나 대학별고사도 어느 정도 장애물이긴 하다. 하지만 수능시험이나 대학별고사는 수준별 수업을 가로막는 치명적인 장애물은 아니다.
핀란드에도 학교시험만 있는 것은 아니다. 조금 무리기는 하지만 우리나라의 수능시험 과 연결시킬 수 있는 대학입시 자격시험이 있고, 우리나라의 대학별고사에 해당하는 대학마다의 개별 입학시험이 있다. 참고로 헬싱키 대학 교육학부의 입학시험에는 필기시험, 적성검사, 개임 면접 이렇게 세 가지의 시험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다양한 대학입시가 각양각색인 핀란드에서도 학생들의 취향과 능력수준을 고려해 수업하고 있다.
내신제도의 폐해 - 가장 낮은 차원으로의 수업을 획일화한다.
나는 아직은 신참 교사라 할 수 있는 한 젊은 영어 교사와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영어 교사로서 자신이 하고 싶은 이상적인 수업을 얘기해 주었다.
첫째. 평가가 읽기와 문법 위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수업 시간에 말하기와 듣기에 많은 시간을 할애 할 수 없다. 둘째. 현재 교사들은 읽기 문법 위주의 교육을 받아왔기 때문에 의사소통 중심의 말하기 수업을 진행 할 능력이 부족하다. 셋째. 말하기 수업을 하기에 학급당 학생 수가 너무 많다. 넷째. 학생들이 영어로 의사소통하며 능동적으로 수업하려는 의지가 부족하다.
이 네 가지 이유 중에서 내신제도를 폐지함으로써 해결 될 수 있는 것은 어느 것일까? 나는 이 중 학급당 학생 수가 너무 많은 점과 학생들의 공부 의지가 부족한 문제를 뺀 나머지 두개는 내신제도 개혁으로 상당부분 개선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아니 내신제도가 폐지되어 수준별 수업이 도입된다면 학생들의 학습 의지도 적잖이 상승할지 모른다. 17세기에 프랑스의 예수회 수도사들이 학교를 운영하면서 여러 수준의 학생들이 한 교실에서 수업을 받는 관행을 깨고 능력별로 학생들을 나누어 수업을 하자 나타난 결과처럼 말이다.
소외와 지루함으로부터 해방되고 너무 어려운 수업을 따라가지 못해 느꼈던 좌절감을 벗어던지자 학생들은 교실에서 보다 순응적인 태도를 보였다. 학습욕구가 강요되지 않고 저절로 생기도록 유도되자 학생들은 이제 교사가 매를 들지 않아도 자발적으로 수업에 참여했다. 내신제도가 없어져 나와 대화를 나눈 그 젊은 교사가 자기 마음껏 수업하고 평가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해보자. 그 교사는 자신이 이상적이라고 생각하는 수업을 실천하지 않았을까? 그 교사는 영어로 자유롭게 의사소통 할 수 있는 능력, 곧 자신이 원하는 수업을 할 능력이 충분히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 젊은 교사는 교사가 된지 2년도 안되어 자기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영어 수업을 포기한 듯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자신이 생각한 이상적 수업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이미 알고 교사가 되었다. 10년 쯤 흐른 뒤 이 젊은 교사는 어떻게 변할까? 10년 후에도 그런 수업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계속 유지하고 있을까? 아니면 자신의 능력을 써먹지도 못하는 사이에 그 능력을 잃어버리고 말게 될까?
내신제도는 교사들의 수업을 가장 낮은 차원으로 획일화시킨다. 교사로 하여금 높은 차원의 수업을 향해 능력을 개발해 나가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가지고 있는 능력도 써먹지 못하도록 한다. 그래서 교사의 능력을 퇴행하도록 한다. 학교에서는 몇 명의 교사가 전체 학생을 몇 개 반씩 나누어 담당하게 된다. 과목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흔히 주요 과목이라 얘기되는 국어 영어 수학의 경우는 대개가 그러하다. 그런데 지금의 내신제도에서는 한 과목을 함께 맡은 교사들이 각기 자신의 특기와 개성을 살리는 것이 불가능하다. 모든 학생이 동일한 시험을 보아야 하는 내신제도 때문이다.
어떤 교사가 자기 혼자만 학교시험을 무시하고 학생들에게 유익하지만 학교시험과 동떨어진 수업을 했다고 가정해보자. 어떻게 될까? 학생들은 그 수업을 좋아할까? 아니다 학생들은 수업시간마다 불안해하고 수업에 대해 불만을 갖게 될 것이다. 아무리 그 수업이 훌륭하다 할지라도 그 교사의 수업을 들은 학생들은 내신 성적에서 불이익을 당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모든 교사가 창의적이고 개성적인 수업을 시도하면 어떨까? 교사들이 합심하여 이런 시도를 한다는 것 자체가 어렵기도 하지만 시도한다고 해도 문제는 남는다. 교사들이 자신의 특기와 개성을 살린 수업을 하면 수업은 서로 많이 다르게 된다. 그러나 내신제도 때문에 시험은 모든 학생에게 동일하게 출제해야 한다. 어떤 특정 반에만 이익이 되게 하거나 불이익이 되게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결국 시험은 교사들의 다양한 수업 내용 중에서 서로 공통되는 부분에서만 출제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그대로 교사의 수업에 압력으로 작용해서 교사들로 하여금 서로의 교집합에 해당하는 부분만을 수업하도록 만든다. 그리고 교집합이 없으면 교집합을 만들어야 한다. 어떻게 만들 것인가? 결론은 정해져 있다. 학교에서 채택한 교과서의 내용을 중심으로 하는 것이다. 결국 지금의 내신제도에서 학교 수업은 필연적으로 주어진 교과서를 해설하고 분석하는 수업으로 귀결되도록 되어 있다. 교사들은 자신의 특기와 개성을 살리지 못하고 교과서만을 해설하고 분석하는 상투적이고 평면적인 수업을 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수업이 단편적 지식의 전달에 머무르게 되는 것이다.
내신제도의 폐해 - 교사의 능력을 하향평준화.
내신제도로 인한 수업의 획일화는 수업의 하향평준화를 낳는다. 반복되는 얘기지만 지금의 내신제도에서 교사들은 반드시 함께 보조를 맞추어 수업 내용을 조절해야 한다. 누가 누구에게 보조를 맞춰 줄 것인가? 능력이 많은 교사가 능력이 적은 교사에게 보조를 맞춰줄 수밖에 없다. 능력 있는 교사가 자신의 능력을 줄여 보조를 맞추는 것은 쉽지만 그 반대는 어렵기 때문이다.
창의적이고 입체적인 수업을 하는 교사가 단편적인 지식 전달 위주의 평면적인 수업을 하는 교사에게 보조를 맞춰 줄 수밖에 없다. 평면적 수업에 익숙한 교사는 창의적 수업을 할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하나 창의적 수업을 하는 교사는 평면적 수업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물론 낮은 차원의 수업을 하는 교사가 높은 차원의 수업을 하는 교사로부터 배우고 깨우쳐서 함께 나가야 바람직하다. 하지만 지금의 현실에서는 그것은 일어나기 어려운 일이다. 현실에서는 높은 차원의 수업을 하는 교사가 낮은 차원의 수업을 하는 교사를 닮아가게 된다. 지금의 내신제도 하에서는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
내신제도의 폐해 - 객관식 위주의 시험문제.
“내가 직접적으로 경험한 독일을 보자.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독일에서 단 한 번도 객관식 시험을 본적이 없다. 일부러 여러 학생들을 초등학교 1학년부터 관찰해 보았지만 객관식 시험은 접할 수 없었다. 또한 잘 아는 독일인들에게 물어보았지만 마찬가지였다. 언젠가 한 친구가 객관식 시험을 치른 경험이 있다고 말했다. 처음 들어보는 말이라며 언제냐고 물었더니, 운전학원이라고 대답했다. 농담이었던 것이다. 사유의 자율성, 이것이야말로 성숙하고 자유롭고 근대적 인간의 정신세계의 기본적인 특징이자 전제조건이다. 그리고 문화적 근대화의 첫걸음이다. 한국 사회도 이제 이 첫걸음을 떼야한다. 정답을 찾는 시험을 폐기함으로써.”
객관식 위주로 시험이 이루어지는 한국의 학교를 비판하며 독일에서 교수 생활을 하고 있는 김덕영이 한 말이다. 우리나라를 보면 객관식 시험에 너무 익숙한 나머지 객관식 시험이 얼마나 교육에 해로운지를 잘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지만 외국은 객관식 시험 문제에 대한 비판의식이 매우 강한 것 같다. 김덕영은 객관식 시험은 학생을 노예로 만드는 시험이라고까지 혹독하게 비판한다.
“객관식 시험이 학생들에게 요구하고 강요하는 노예의 길은 크게 두 가지 기술로 이루어진다. 공부하는 기술이 그 하나요, 시험 보는 기술이 그 다른 하나이다. 전자는 주인이 준 것을 충실히 기억하는 기술이요, 후자는 주인이 묻는 것에 충실히 답변하는 기술이다. 실수는 용납되지 않는다. 실수는 처벌로 이어진다. 여기에는 자유로운 개인의 주체적이고 자율적인 인식과 사유가 자리할 여지가 조금도 없다. 모든 것은 오답을 피한다는 목표로 수렴된다. 노예는 주인이 원하지 않는 것은 피해야 한다. 가장 좋은 노예는 주인이 원하는 것을 즉각적으로 내놓은 노예이다. 명령만 입력하면 자동으로 작동하는 기계 인간과 같은 노예가 가장 좋은 노예인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세분화된 공부 기술과 시험 기술을 충실히 지키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리하여 개인의 자유로운 인식과 사유를 최소화하고 무력화시키며, 궁극적으로는 무화시켜야 한다. 이른바 공부 기술과 시험기술은 ‘노예 행동수칙’이요 ‘기계 인간 수칙’이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내신제도에서 교사들은 시험문제를 객관식으로 출제할 수밖에 없는 강력한 압력을 받고 있다. 학교의 학생들을 일렬로 줄 세우는 데에 가장 시비가 적은 문제가 객관식 문제이기 때문이다. 학생들의 학습 능력과 학습 성과를 종합적으로 평가하는 것도 힘들고 논술식 출제로 학생들을 평가하는 것도 어렵다. 수많은 시비 거리가 생기기 때문이다. 설사 주관식으로 문제를 출제한다하더라고 진정한 의미의 주관식 문제는 출제하기 어렵다. 진정한 의미의 주관식 문제에서는 학생들의 주관적 생각이 논리적인 근거만 있다면 얼마든지 드러날 수 있는 것인데, 이것은 일목요연한 채점이 매우 곤란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개의 경우는 명확한 답이 존재하는 단순한 문제를 출제하게 된다. 그러나 이런 문제는 주관식 문제의 형식을 취했을 뿐 사실은 객관식 문제에 불과하다.
이러한 객관식 시험은 다시 학교 수업을 왜곡하게 된다. 학교시험이 객관식이기에 교사들과 학생들은 객관식 시험 문제 풀이에 도움 되는 수업을 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학교 수업은 단순 명확한 답을 쓰는데 유리한 단편적인 지식 전달 위주의 수업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좌파가 거부하는 수준별 수업은 오히려 좌파 성향 정책이다.
수업 시간에 가장 고통 받는 아이들은 누구일까? 이미 학원에서 앞질러 공부를 다 해놓아서 수업 시간이 심드렁하게 느껴지는 아이들일까? 열심히 배워나가려는데 떠들고 장난치는 아이들 때문에 공부를 방해 받는 아이들일까? 아니면 수업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가만히 앉아있기만 하는 아이들일까? 아니면 가만히 있기도 어려워 떠들고 장난치는 아이들일까? 누구의 고통이 제일 클까?
나름대로의 다 고통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지금의 학교에서 가장 고통 받는 아이들은 최고로 공부 잘하는 아이들이 아니라 수업을 따라가지 못해 공부에 흥미를 잃어버린 아이들이라는 것이다. 이 아이들은 자신들의 능력 수준에 맞는 교육을 제공받지 못한 채 수업 분위기를 망치다고 매일같이 야단만 맞고 있다. 교사들은 어찌됐든 수업을 진행해야하기에 떠들고 장난치는 아이들을 조용히 시킬 수밖에 없고, 그래서 아이들을 혼내고 벌세울 수밖에 없지만, 이 아이들은 자기들로서도 어찌할 수 없는 일로 매일매일 고문을 당하는 것이다. 이 아이들에게 학교는 어쩌면 감옥일 뿐이다. 결국 이 아이들이야말로 획일적인 학교 교육의 큰 피해자인 것이다.
수준별 수업은 모든 학생들에게 이익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이익을 보게 될 학생들은 지금의 획일적 수업체계에서 수업내용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학생들이다. 학생들의 지적 수준과 능력은 다양하다. 지적 수준이 떨어진다고 차별받고 지적 수준이 높다고 차별받아서는 안 된다. 학교는 학생들의 다양한 지적 수준과 흥미를 고려하여 그들에 맞는 수업을 해주어야 할 의무가 있다.
획일적 교육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점차로 고교입시부활론에서 대안을 찾고 있다. 수준별 수업으로 지금의 획일적 수업의 문제점을 치료하지 않으면 고교입시부활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주장은 점차로 힘을 얻어갈 것이다. 고교입시 부활을 획책하는 것도 시대착오적인 것이지만 수준별 수업을 반대하는 것도 시대착오적인 것이다. 따라서 수준별 수업을 반대하는 전교조는 비판 받아 마땅하다. 수준별 수업에 대한 태도에서 전교조는 전형적인 수구주의의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강제보충수업의 완전한 부활을 시도하는 우파도 수구주의지만 수준별 수업을 반대하는 전교조도 그에 조금도 뒤지지 않는 수구주의인 것이다.
알아듣지도 못하고 재미도 흥미도 느낄 수 없는 수업을 오직 고통 속에서 인내하고 있을 뿐인 아이들은 가난한 집 아이들이 상대적으로 더 많다. 이 아이들에게도 자신이 듣고 이해할 수 있는 수업을 들을 권리가 있다. 자신들의 흥미를 끌 수 있는 수업을 들을 권리가 있다. 그리고 자신들이 감당하고 도전해 볼 만한 시험을 볼 권리가 있는 것이다.
이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해법이 바로 수준별 수업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수준별 수업을 반대하는 좌파의 행동은 좌파의 논리와 이념에 배신하는 것이다. 그것은 아이들에게 수준별로 다양한 교육서비스를 제공하는 귀찮음을 회피하겠다는 태도에 불과하다. 속편하게 오직 한 가지의 서비스만을 제공하겠다는 관료적 편의주의를 대변하는 것에 불과하다.
물론 좌파의 우려와 걱정이 전혀 얼토당토않은 것은 아니다. 이명박 정부가 추진하려하고 조선일보가 옹호한 수준별 수업은 사실은 과목별 이동수업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과목마다 석차로 학생들을 나누어 진행되는 과목별 이동수업은 본질적으로 우열반 수업과 크게 다를 것이 없기 때문이다. 한꺼번에 나누었느냐 과목 별로 나누었느냐만 다른 것이다. 이런 수업은 우열반 수업과 마찬가지로 공부 못하는 아이들을 소외시키고 도태시킬 소지가 우열반 수업만큼은 아니지만 우려할 만큼은 존재 한다. 그리고 단순히 과목별 석차로 나누어 이동하는 수업은 그야말로 반을 나누어 이동수업을 하고 있을 뿐 모든 것은 우열반 수업과도 크게 다르지 않고 지금의 획일적인 수업과도 별반 다르지 않다.
과목별 이동수업이란 이름의 수준별 수업 또한 학생들의 눈높이에 맞는 다양한 수업을 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우열반처럼 학생들을 성적이 좋은 학생과 좋지 못한 학생으로 나누어 놓았을 뿐이다. 학생들의 수준과 흥미를 고려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 또한 공부 못하는 학생들을 들러리로 만드는 제도에 불과하다. 우열반 수업, 과목별 이동수업, 현재 이루어지고 있는 수업은 모두 본질적인 면에서 학생들의 다양한 수준을 무시하는 획일적 수업에 불과하다.
이명박 정부는 수준별 수업의 자율화를 말했지만 진짜 수준별 수업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이명박 정부의 학교자율화 정책 중 가장 가치 있는 정책인 수준별 수업에 대한 자율화는 사실상 실패가 예정되어 있는 것이다. 성공해서는 안 될 정책인 강제보충수업의 자율화는 성공할 것이 분명한데 반드시 성공해야 할 정책인 수준별 수업의 자율화는 실패가 분명한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명박 정부의 수준별 수업 정책을 무조건 반대하는 좌파의 행동이 타당성을 획득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좌파는 어떻게 했어야 하는가? 더 강력한 수준별 수업, 즉 진정한 의미의 수준별 수업을 요구했어야 한다. 정부가 하려는 과목별 우열반 수준의 미봉적인 수준별 수업을 뛰어넘는 진정한 의미의 수준별 수업을 주장했어야 한다. 그리고 그에 대한 방법론을 제시했어야 한다. 과목별 우열반 정도에 불과한 수준별 수업을 진정한 수준별 수업으로 발전시키려고 노력했어야 한다.
수준별 수업은 학교 교육의 사활이 걸린 맥점(脈點)이다.
수준별 수업은 단순히 고려해볼 만한 여러 가지 정책 중의 하나가 아니다. 그것은 학교 교육의 사활이 걸린 맥점인 것이다. 학교 교육이 붕괴한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는 학생들의 다양한 수준과 취향을 무시하고 오직 하나의 획일적 수업만을 해야 하는 학교제도에 있다. 지금의 학교제도에서 교사는 천차만별의 학업 능력과 성향을 가진 학생들을 항상 똑 같이 가르쳐야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는 제 아무리 능력 있고 정열적인 교사라 하더라고 질 높은 수업을 하는 것은 너무나 어렵다. 좌파는 수준별 수업의 중요성을 깨달아야 한다. 수준별 수업은 단순히 하나의 정책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학교 교육의 사활이 걸린 핵심 정책이라는 것을.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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