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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호’와 ‘안전’에 집중하는 진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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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231) | 추천 (0) |점수 (0) | 2010-01-13 18:20:49 고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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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호’와 ‘안전’에 집중하는 진보 고원 (상지대 교수)
나는 요즘 우리 사회가 이렇게도 참담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닫고 있다. 무수한 사람들이 평범한 상식에 속하는 권리를 행사했다는 이유로 추풍낙엽처럼 쓰러지고 있다. 이름 있는 명사들은 주목이라도 받지만 이름 없는 사람들은 아무 주목도 받지 못하고 뒤안길로 사라지고 있다. 법은 약자에겐 가혹한 형벌이고 강자에겐 한없이 관대하고 따뜻한 세상이 되었다. 하지만 나를 낙담케 하는 것은 그것 자체가 아니다. 지금으로부터 7년여 전 ‘반칙과 특권’에 분노하고 ‘원칙과 상식’에 열광하던 국민들이 지금 온데 간 데 없어졌다는 사실 때문이다. 나의 상식이 잘못되지 않았다면 지금 세상이 돌아가는 방식은 ‘엿장수 맘대로’ 그 자체이지만 사람들은 명백한 불의 앞에서 항거하지 않는다.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기준이 흐려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겁, 무력감, 냉소가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키워드가 되고 있는 것이다.
그 뿐인가? 조삼모사(朝三暮四)의 경제는 또 어떠한가? 하루 종일 땅을 파고 해질녘 무렵에 다시 메우는 병영식 노가다 경제로 막대한 사회적 자원, 곧 나의 혈세가 흘러들어가고 있다. 삽질경제가 그것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마뜩찮아 하지만 이에 항거하지는 않는다. 잘 사는 사람과 투기하는 사람에게는 더 많은 부를, 열심히 일하며 투기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상대적 빈곤을 가져다주는 이 사회를 보면서 사람들은 투기의 행동규범을 배우는 데 몰두하고 있다. 자신의 것을 빼앗는 강자에게는 참고 넘기면서 자신보다 조금 더 가졌거나 좀 더 가져보겠다고 아우성치는 옆에다 분풀이 해대는 비겁한 사회가 되었다. 결국은 한 바퀴 돌고나면 자기 자신이 분풀이 당하는 옆 사람에 불과한 데 말이다.
왜 그러할까? 먹고 사는 문제가 워낙 다급하면 그러는 것인가? 싱가포르 전 총리 리콴유의 이름을 딴 리(Lee)테제라는 것이 있다. 만일 가난한 사람들에게 정치적 자유와 경제적 필요의 충족 사이에 선택권이 주어진다면 그들은 항상 후자를 선택할 것이라는 주장이 그것이다. 자유와 권리들은 경제발전을 방해할 뿐이고 질서와 규율을 더 중시하는 이른바 ‘아시아적 가치’가 우선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조금만 시야를 넓히면 그 같은 테제는 아주 협소할 뿐만 아니라 시대착오적이다. 이명박 대통령이 신년연설에서 밝힌 일류 선진국가의 목표를 달성한 나라들 중에서 정치적 자유를 희생하는 방식으로 발전을 이룩한 나라들은 단 한 곳도 없다. 선진국가로의 도약은 가치 있는 삶에 대한 기준과 정의감, 그리고 합당한 자존감을 지닌 국민들이 존재할 때 실현될 수 있다.
미국의 흑인노예들이 경제적 이득보다 자유를 선택했다는 사실은 별로 알려져 있지 않다. 흑인노예들은 그들이 소비하는 상품량에서 자유로운 농업노동자들보다 나았으며, 미국이나 유럽의 자유로운 도시의 노동자들보다 훨씬 오래 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흑인노예들은 자유를 찾아 훨씬 더 열악한 경제적 여건을 감수하고 계속 도망쳤다. 남북전쟁 후에 농장주들이 그들이 노예였을 때보다 두 배나 되는 높은 임금을 제시하면서 노예적 집단노동으로의 복귀를 유혹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거부하였다.
그런데 왜 한국 사회의 대중들은 ‘경제 살리기’를 위해, 혹은 ‘먹고사는 문제’를 위해 정치적 자유를 희생하는 데에 기꺼이 동의하고 있는가? 실제로는 자신의 밥그릇을 빼앗아가는 그런 정책과 정치에 동조하고 있는가? 그만큼 경제위기가 심각하고 치명적인 것일까? 그것은 결코 아닌 것 같다. 인도출신의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아마티아 센(Amartya Sen)은 한국 등 동아시아국가들이 1997년에 겪은 5% 정도에 성장률 후퇴란 사실상 매우 미미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온 사회가 파국과 정신적 공황상태에 준하는 상태로 곧장 떨어져 버리고 말았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1997년 동아시아에서의 경제위기 이후 난공불락일 것이라고 믿어지던 아시아의 성공에 대한 자신감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
아마티아 센은 대기근에 대한 독보적 연구를 통해 대기근이 생산량의 하락과 필연적인 관계가 없으며, 오히려 생산이 충분할 때에도 대기근사태가 발생하는데, 그 이유는 가난한 사람들의 목소리가 정책과정에 잘 반영되지 않고, 공급부족사태가 벌어질 것이란 소문에 사회 전체가 심리적 공황상태에 빠져버리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나는 한국사회의 문제도 이런 심리적 공황이 문제가 아닐까 생각한다. 자살률, 범죄율 등 각종 사회지표의 급속한 악화와 자신의 권리에 대한 배타적이고 몰염치한 주장, 그리고 폐쇄적이고 파편적이며 필사적인 경쟁, 권력의 위광이나 개인적 연줄망에 대한 집착의 재강화 현상이 그것이다. 사실 어떻게 보면 이명박 정부의 통치행태는 그러한 대중들의 퇴행 위에 얹어진 것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이와 관련하여 한신대 김종엽 교수는 “사람들이 입시경쟁과 아파트 투기 혹은 연줄과 후견관계에 경사되는 것은 제약된 기회와 기형적인 제도의 산물”이라고 말한다. 사람들은 “성인의 도를 따를 만한 의지와 능력이 모자라더라도 제도적인 기회가 열린다면 자신 안에 있는 속물적 성향보다는 더 생태적이고 더 평등한 삶에 대한 지향을 발현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김종엽 교수의 이 같은 주장이 민간파시즘론의 도출을 경계하자는 취지에는 사뭇 동감이지만, 그의 주장 또한 과도한 바가 없지 않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적어도 민주주의 사회에서 시민의 의식은 단순히 제도의 수동적 반응체인 것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성숙한 시민의식은 환경적 여건의 곤란을 딛고 역으로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는 기량을 보여줄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똑같은 대공황을 겪으면서도 민주주의와 복지국가를 견결하게 발전시킨 나라들과 파시즘이나 군국주의로 나아간 나라들 간의 차이인 것이다.
민주주의의 위기는 민주주의를 겪어보지 못한 나라들에서보다 민주주의를 어설프게 겪어본 나라들에서 더 치명적으로 작용한다. 독일과 일본이 그 예이다. 이들 나라들은 각각 나치즘과 군국주의로 나아가기 직전에 바이마르 민주주의와 다이쇼 데모크라시(大正 民主主義)를 구가하고 있었다. 일본의 경우 다이쇼 시대는 1912년 7월 30일부터 1926년 12월 25일까지 지속되었는데, 이 시기에 일본 본국에서는 다이쇼 데모크라시로 인하여 노동운동, 민권운동, 여성운동 등 지배 권력에 대한 민중의 저항과 권리 찾기 운동이 활발하던 시기였다. 그러나 이런 분위기를 일본 제국의 위기로 판단한 우익기득권자들은 1923년 관동대지진을 기화로 민중들을 선동하여 조선인을 대량으로 학살하고, 또 심지어는 자국민인 사회주의자를 학살하도록 조종하였다. 그로부터 10년 후 정당정치체제에 흡수되지 않았던 정치세력들, 즉 군부·관료·우익단체 등의 주도로 다이쇼 데모크라시는 붕괴되고 파시즘 체제로의 이행이 개시되었던 것이다.
나는 한국의 진보세력에게 주어진 가장 시급한 과제는 바로 민주주의의 퇴행을 막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익 포퓰리즘의 선동에 사람들의 마음이 저당 잡히지 않도록, 그래서 사람들이 민주주의와 정의와 양심을 학살하는 데 나서지 않도록, 공범의식으로 동질화되지 않도록 죽을힘을 다해 노력해야 한다고 본다. 만일 그것을 막지 못하면 민주주의의 후퇴가 수습되고 복원될 기회를 맞이해도 치유력을 잃어버리게 된다. 필자가 5년 전인가 연구답사 차 오키나와에 간 적이 있었다. 오키나와는 본시 독립왕조국가로서 일본에 복속당한지 얼마 되지 않은 섬이다. 그런데 2차 대전에서 일본의 패망 직전 최후의 전투가 바로 이 섬에서 전개되었는데, 이 섬 주민들은 일본군의 세뇌와 선동에 속아 넘어가 미국군대를 백색귀신으로 철석같이 믿었으며, 깊은 동굴 속에서 자신의 어린 아이들을 이불에 말아 석유를 뿌리고 불태워 죽이는 등 자발적인 집단학살을 감행했다. 바로 이런 공범화로 인해 오키나와의 주민들은 종전 후에도 집단학살의 진상을 수십 년 동안 묻어두고 살아왔다. 그 결과로 일본 군국주의의 외압에 의한 만행도 더불어 묻히게 되었다. 주민들 스스로가 그것의 기억을 드러내기 싫었기 때문이다.
나는 우리 사회 대중들의 의식이 퇴행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진보가 ‘보호적 안전’이라는 키워드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보호적 안전성이란 인간의 능력을 강화하고 보호하기 위한 사회와 국가의 능력이다. 사람들이 비참해지고 굶어죽는 것을 막기 위한 사회적 안전망, 더 나은 삶을 살아가는 데 결정적 영향을 주는 고용안전망․교육안전망 등 사회적 기회의 제공이 그것이다. 취약계층에 속하는 사람들이 더 이상 비참해지고 피폐해지지 않도록 보호하고, 누구나 진취적 모험심을 가지고 자신의 삶을 선택할 수 있는 사회적 기회를 늘려주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사람들이 과도한 경쟁에 내몰려서 서로를 질시하지 않게 하고, 이해충돌에 직면하여 결사항전하지 않게 해야 한다. 특히 권력과 부가 박탈된 사람들일수록 좌절과 보상에 대한 열망이 강하고 보수적 의식을 갖게 된다는 것은 이미 여러 조사에서도 입증된 바 있다. 바로 이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하면 진보의 기반은 끊임없이 위협에 처하게 될 것이다.
바로 이것이 한국의 정치지형이 남미의 그것과 결정적으로 다른 지점이다. 남미에서 사회양극화는 정치양극화로 연결되어 나타난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사회양극화가 계급배반적 양태로 표출되고 중간층의 진보성을 상대적으로 부각시킨다. 이는 한국이 성장가도를 달리는 국면에서는 일정하게 순기능을 했다. 그러나 사회가 침체국면으로 들어서자 계속적인 질곡으로 작용하고 있다. 바로 이런 왜곡된 정치지형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진보가 갖추어야 할 정치력이란 결국 이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보호’와 ‘안전’이란 화두에 집중하여 소외와 불안에 지치고 날카로워진 대중들의 처지를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 그들을 위해 대담하고도 거침없이 전진하는 과단성과 실질적 힘을 보여주는 전략의 구성 능력이 요구된다. 그런데 지금 우리 사회의 진보는 어느 정파․정당을 막론하고 무지하기도 하거니와 산만하기 이를 데 없다. 또 매너리즘과 정파적 편협성, 그리고 협량한 기득권에 안주하고 있다. 어찌할 것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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