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토론 > 21C 진보정당방

|
![]() |
사회적 합의를 파괴하는 이명박 정권를 심판하는 방법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
![]() |
조회 (1819) | 추천 (0) |점수 (0) | 2009-12-09 14:57:57 김두수 |
![]() |
세종시.jpg |
|
‘사회적 합의’를 파괴하는 이명박 정권을 심판하는 방법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김두수(사회디자인연구소 상임이사)
1. 대한민국의 현주소
대한민국은 1987년 6월 민주항쟁을 통해 오랜 권위주의 통치를 끝내고, 한국 정치의 가장 중요한 과제인 ‘절차적 민주주의’의 기초를 만들 수 있었다. 군부독재 치하에서 간선제로 치러졌던 대통령선거를 직선제로 바꾸는 개헌을 쟁취하여, 그동안 5명의 대통령을 선출함으로서 절차적 민주주의 정통성을 확보하였다. 하버드대학의 정치학자인 헌팅턴(Samuel P. Huntington)은 신생국에서 민주주의가 공고화(consolidation)되기 위해서는 ‘두 차례의 정권교체 테스트’ (two turn-over test)를 통과해야한다고 주장하였다.(Huntington, 1991) 헌팅턴의 말대로 대한민국은 한 차례 평화적 정권교체와 야당이 된 정치세력(구집권당)에 의해 다시 정권교체가 되었다. 즉 ‘두 번의 정권교체 테스트’에 의해 민주주의가 제도화되고 안정을 이루어야 하는데, 오히려 대한민국의 사회는 이전에 보지 못한 격렬한 정치적 대결과 갈등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미국 부시(George Walker Bush) 대통령이 2000년, 첫 번째 대선에서 승리한 뒤, 집권 100일 동안, 철저하게 ‘ABC(Anything But Clinton) 노선’을 펼친 것으로 유명했다. 민주당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이 실시한 정책은 모두 배척하고, 극단적인 반대 방향으로 국정을 운영했다. 그렇게 한 이유가 ‘아버지’ 부시 대통령을 꺾고, 집권한 클린턴에 대해 ‘아들’로서 보복의 심리가 발동했을 수 있다는 시중의 우스갯말도 있지만, 사회과학적 사실은 1980년대 레이건 대통령의 등장 이후, 신자유주의 정책을 계속 밀고나갔던 이념형의 정치세력들이 ‘두 차례의 정권교체’ 과정을 거치면서 극단적 신념이 자가발전하면서 증폭된 결과로 나타난 것이다. 또한 자기 계급적 이익에 충실한 천민적 사고체제를 가진 지도자가 집권하면 나라가 어떻게 바뀌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모델이 되었다.
이명박 대통령이 태어난 해가 1941년이었고, 70~80년대 개발독재 시절, 인생의 황금기를 사기업의 CEO로 지냈기 때문에, CEO는 민주적 토론이나 합의보다는 결단을 내리면 충성스럽게 집행하는 것을 제일 가치로 삼는 군인들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과거 군부독재정권 시절, 집권자의 입장에서 볼 때, 야당은 제압의 대상이거나, 없애야 할 섬멸의 대상이었다. 이명박 대통령은 군부세력으로써 정치를 시작한 것은 아니지만, 대통령이 된 지금도 과거의 낡은 가치관과 리더십이 바탕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야당과 정치적 반대자에 대한 인식에서 정치적 파트너라는 인식보다는 불필요한 불만세력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지배적임을 알 수 있다. 지난 11월 27일 ‘국민과의 대화’가 아닌 ‘대통령과의 대화’에서 이명박 대통령은 4대강 사업에 문제를 제기하는 세력과 야당을 경부고속도로 건설과 청계천 공사의 예를 들면서 반대만하는 사람들로 규정짓고 있었다. 이러한 신념체계와 리더십에 기초해 있기 때문에 용산 철거민에게 곧바로 경찰특공대를 투입하고, 국민의 여론은 미디어법 개정에 반대 의사가 다수임에도 무리하게 강행 처리하고, 환경영향평가와 사업타당성을 정밀하게 조사하지도 않고, 막부가내로 4대강 사업을 밀어붙이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의 극단적 사고체계를 보여주는 예는 무수히 많지만, 최근에 와서 두드러지고 있다. 미국의 부시 대통령처럼 ‘ABC(Anything But Clinton)노선’에 입각하여 ‘ABR(Anything But Roh)노선’을 집권도 하기 전인 ‘인수위’시절부터 시작하더니, 노무현의 흔적은 뿌리까지 뽑아버리겠다는 듯 추진하고 있는 ‘ABR’의 결정판은 ‘세종시’ 백지화 추진이다. 행정중심복합도시인 ‘세종시’를 근본적으로 부정하고 국가균형발전을 코웃음 치면서 ‘수도권 중심국가’를 추구하고 있다. 세종시를 백지화하는 일련의 과정에서 이명박 식(式) 정치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냉정하게 알아야 할 것은 세종시 문제는 단순히 대통령 개인의 리더십 문제에 국한되지 않으며, 한국사회에서 결렬하게 일어나고 있는 이념투쟁의 연장선에 있으며, 편파적 극단적 이념을 추구하는 한 무리의 정치세력을 기반으로 일으키고 있다는 사실이다.
20년이 넘게 쌓아온 민주주의의 정통성과 사회적 합의에 기초한 국가사업을 손바닥 뒤집듯이 번복하는 배경에는 무엇이 있을까? 극단적 대결주의 정치와 파당적인 정당정치를 추구하는 배후에는 무엇이 있을까? 분명 이념과 신념체계가 자리 잡고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2007년 대통령 선거를 둘러싸고 한국사회에 나타났던 이념적 대립과 분화를 직시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이 글에서 첫 번째 살펴볼 것은 한국사회의 보수적 이념의 뿌리를 확인하고, 편파적인 이념체계의 근거를 해부하는 것이다. 한국사회를 극단적 대결로 몰고 가는 이념이 사실은 허구적 담론에 기반을 둔 사익(私益)추구의 명분에 불과하다는 것을 증명할 것이다. 두 번째로 한국정치에서는 한국사회의 분열과 대립이 어떻게 반영되고 있는지, 그리고 독점정부를 구성하고 있는 정치체제와 정당구조에서 어떻게 증폭되어, 민주주의의 완성을 방해하고 있는지를 살펴서 셰보르스키가 말한 ‘불확실성의 제도화’(institution of uncertainly)방안을 알아본다. 세 번째로 이명박 정권에 의한 독선적 결정이 가장 극단적 형태로 나타나고 있는 세종시 문제를 중심으로 비판하고, 극복의 대안과 전망을 정리해 보고자 한다.
2. 한국 보수의 이념적 뿌리와 실체
한국사회에서 보수의 실체를 보여주는 두 사건이 있다. 하나는 11월 26일 ‘국가정상화추진위원회’라는 단체에서 ‘친북 인명사전’ 편찬 계획을 밝히는 자리에서 몸싸움과 욕설 비방이 난무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추진위가 전직 대통령은 1차 명단에 포함되지 않았다고 밝히자, 기자회견장에 참석한 ‘대한민국 어버이연합’ 등 60~70대 70여명이 고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을 명단에 포함시키지 않은 것에 대해 거세게 반발하면서 오고갔던 말들이다. “너 간첩이지” “북한에서 돈 얼마나 받았냐?” “그럼 당신들도 인명사전을 따로 만드세요! 당신들, 좌파 쪽에서 방해하려고 온 거 아니야!”라고 맞불을 놔 봤지만 “우리가 빨갱이라고? 너 이 자식, 네가 빨갱이지?” 등 욕설과 고성이 오가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40분 만에 기자회견이 중단됐다. 이런 희극적 상황이 보수진영 한편에서 벌어지고 있다.
또 하나는 ‘한반도선진화재단’이다. 박세일 이사장이 주창한 `한반도 선진화론`은 한나라당의 핵심 당론으로 자리 잡고 있고, ‘공동체 자유주의’는 당헌에 명시되어 있다. 2006년 설립한 한반도선진화재단은 한국 보수 진영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싱크탱크다. 그들은 2009년 3월, 진보단체인 ‘좋은정책포럼’과 함께 공동주최한 ‘한국의 진보를 말한다!’라는 토론회도 개최했다. 상당한 이론적 수준의 연구를 통해 진보의 허실을 공략하고 있다. 소위 말하는 ‘진보동네 어른들’의 내공을 넘어서고 있다는 평을 받고 있다. 미래세대에 대해서도 투자하고 있는데, 선진화아카데미 '청년한선'이라는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한 학기에 대학생 40여 명씩 지금까지 8기를 배출하고 있다.
이처럼 지금 한국보수의 스펙트럼은 넓고 다양하다. 하지만 보수의 뿌리와 줄기는 한국사회의 역사성에 의해 매우 협소한 지형에 의지하고 있다. 지금 보수의 주류들은 해방 후, 친일의 과거를 숨기기 위해 ‘반공주의’에 목숨을 걸었고, 6.25전쟁을 거치면서 한반도 남쪽의 주류가 되었다. 박정희 군부세력에 의한 근대화, 산업화 정책에 편승하여 물적 토대를 형성하였고, 세계적 냉전대결구도에서 미국의 전초기지역할을 기꺼이 맡았다. 50년 동안 자유주의는 곧 반공주의였고, 산업화의 과실이 집중되어 있는 영남을 기반으로 정치적 뿌리를 내렸다. 87년 민주화운동 이후, 정치적 헤게모니가 흔들리기까지 영남을 정치적 기반으로 하는 보수세력은 철옹성이었다. 97년 IMF 외환위기 이후, 수평적 정권교체가 일어나자, 비로소 내부의 반성이 시작되었다. 이른바 ‘자유주의연대’ 등의 뉴라이트의 등장으로 이념적 협소성을 재고하기 시작했고, 박제화 되어 있던 ‘자유주의’를 재정립하는 이념 철학적 체계정비와 방향전환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진보와 보수가 정립-반정립의 과정을 거치게 된 것이다.
현재의 한국사회는 이념적 분화가 뚜렷하다고 해도 맞는 말이고, 이념적 구분이 불분명하다고 해도 맞는 특징을 가지고 있는 사회다. 이러한 인식이 가능한 이유는 이념대립 형태에서 좌와 우의 개념과 진보와 보수의 개념이 혼동되어 사용되기 때문이다. 먼저 좌와 우의 개념을 정리해 보자. 좌-우의 개념은 유럽의 역사에서 탄생한 역사적 함의를 가지고 있다. 프랑스대혁명 시절에 탄생하여, 자본주의 발달과정에서 사회주의의 등장으로 분명해진 개념이다. 소유의 문제, 분배의 문제, 개인과 집단의 문제에 구분선이다. 현재의 이념적 기준으로 정당을 살펴본다면, 시장경제를 기본정강으로 제시하는 정당은 우파이고, 국가의 개입을 기본정강으로 하는 정당은 좌파다. 거칠게 분류하여 한나라당, 민주당, 선진당, 창조한국당은 우파이고, 민노당, 진보신당은 좌파다.
진보와 보수는 어떻게 구분하는가? 진보와 보수는 절대적 역사적 개념이 아니라 상대적 상황적 개념으로 보아야 한다. 진보는 미래의 변화를 추구하는 세력이고, 보수는 과거의 장점을 지키려는 세력이다. 한국의 실정에서, 사회의 개혁과 변화를 주장하면서 민주화를 중심 가치로 내세우는 저항 세력은 진보로 보았고, 한국사회에서 과거 발전을 긍정해왔던 산업화를 중심 가치로 생각하는 세력은 보수로 볼 수 있다. 이러한 기준점으로 분류해 볼 때, 한국 상황에서 새로운 변화를 추구하고 있는 점에서 민노당, 진보신당은 진보로 분류할 수 있다. 나라와 시대의 상황에 따라 진보를 ‘개혁파’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러시아의 우파인 옐친을 개혁파로 부르고, 좌파인 공산당을 보수파로 부르기도 했다. 아무튼 이념적 구분을 하기도 하지만, 현실에서 이념 대결을 조장하고, 과대하게 포장하여 이념논쟁을 벌려서 자신의 정치적 자산으로 삼고, 지지 기반을 형성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뉴라이트의 탄생과정을 보면, 이념논쟁을 통해 자신들의 정치적 존립 근거를 찾으려고 했고, 이러한 적대적 공존관계, 상호의존관계 형성을 통해 일정 부분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좌와 우, 진보와 보수의 혼재 속에서 오늘날 대한민국의 혼란이 잉태한 것이다. 한국 정치에서는 역사적 규정이 명확한 좌-우의 개념 규정을 자의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80년대 이전에는 주로 정치적 반대자들을 공격할 때 사용했다. 80년대 이후에는 일부 좌파들 스스로 자신들의 정체성을 규정하기 위해 ‘좌파’라는 용어를 공식화하려는 시도도 있었다. 이런 인식은 소수에 불과했기 때문에 민노당도 좌파정당이라고 하지 않고 진보정당이라고 하고 있다. 반면에 한국사회에서 실질적 권력은 보수가 막강하다. 냉전 반공주의와 천민자본주의라는 두 가지 속성을 결합한 한국의 보수는 자랑스러워할 가치와 덕목이 없긴 하지만, 우리사회에서 주류임을 공공연하게 내세우고 있다. 일부 뉴라이트에서 ‘보수’라는 용어가 가진 한국적 이미지 때문에, ‘진보’라는 용어를 좌파에게 빼앗길 수 없다고 ‘자유주의진보연합’을 결성하기도 했다. 또한 실제에 있어 좌파나 우파라고 주장하는 정치세력의 실천적 형태가 뒤집어진 행태로 나타나기도 하기 때문에 바라보는 사람들의 가치관에 혼돈을 일으키는 경우가 있다. 즉 시장의 가치를 강조하는 보수파가 재벌체제를 실질적으로 옹호하는 발언을 하는가 하면, 민주주의를 외치는 진보파가 북한의 인권문제에서는 어쩔 줄 몰라 한다. 정치에서 우파는 서구의 온건보수로 위장하고 좌파는 사회민주주의로 포장하면서 속내를 숨기고, 중도를 지향하는 것처럼 발언하니까 유권자는 실체를 잘 모른다. 정치를 하는 당사자들은 진보정당과 보수정당을 구별하지만, 유권자들은 ‘진보적’이라는 용어를 고정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다보니 2007년 대선에서 이명박 후보가 가장 진보적이라고 생각하는 유권자가 많았다.
그 이유를 생각해 보면, 의외로 간단하다. 김대중 정부에 이어 노무현 정부가 집권한 것은 ‘민주화 가치’를 지향하는 세력이었기 때문에, 나름대로 지켜야할 것이 많았다. 단적으로 교육에서 3불 정책 같은 것이 예가 될 수 있다. 교육개혁을 위해 무엇을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무엇 무엇은 안 된다는 정책이었다. 그러니 국민들의 눈에는 ‘보수(?)’세력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한국사회가 한세대를 거치면서 앞만 바라보면서 압축성장을 해왔고, 오로지 성장과 ‘1등’ 그리고 ‘세계 최고’를 꿈꾸면서 몸을 불려왔다. 과거의 패러다임이 극대화되었을 때, IMF가 터졌다. 이를 계기로 김대중 대통령은 세계화시대에 맞는 한국사회로 개조를 시도했고, 뒤이어 집권한 노무현 대통령은 국민의 정부에서 추구한 지향의 연장선에서 한편으로 관리(정책 계승)하고 한편으로 확장(FTA 시도)하려고 했다. 이러한 방향은 민주화운동 20년의 과정에서 발생한 부정적 자산을 되돌아보는 것에 소홀하게 되었다. 전략적 성찰이 부재했고, 그러한 노력이 부족했다는 말이다. 물론 당시 야당인 한나라당의 악의적 정치투쟁과 조중동이라는 악랄한 선전선동으로 노무현 대통령을 집중 공격한 결과이기도 하지만, 민심은 모든 것(?)을 바꾸기를 원했다. “모든 것을 다 바꾸겠다”는 이명박 후보가 진보적이 된 근거가 되었다.
정말 문제는 국민들의 선택이 아니라, 선택된 자들의 실체다. 좌-우 대립이 격렬했던 유럽사회도 세계2차대전을 거치면서 복지국가형성이라는 균형점이 있었고, 정치적 대타협을 통해 ‘민주주의 규칙’을 합의해 갔다. 민주주의의 제도화를 통해 정치적 안정을 이루어 가는 가운데, 정치적 경쟁이 있었던 반면에 이명박 정부에 들어서면서는 모든 것을 부정하는 자세는 극단적 대결을 불러올 수밖에 없다. 지금의 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이 펼치고 있는 각종 정책은 80년대 미국 레이건과 영국의 대처가 했던 ‘신자유주의’를 모방하고 있는 것처럼 하고 있다. 소위 ‘신자유주의적 정책’의 후과로 나타난 ‘세계적인 금융위기’로 인해 미국과 세계가 서둘러서 재검토하고 있는 정책임에도 불구하고, 뒤늦게 한국에서 ‘선진’ ‘개혁’이라는 명분을 붙여서 시행하고 있으니 걱정이 없을 수가 없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한국의 보수세력과 이명박 대통령의 사상이나 철학적 체계가 ‘토건형 신자유주의’가 아니라, 사실은 사적인 이익을 추구하는 ‘천민적 자본주의자’에 불과하고, 사실상 “도적, 먹튀, 분식 집단”이라는 수식어를 붙일 때, 그 실체를 정확하게 볼 수 있다는 점이다.
3. 제왕적 대통령과 독점정치체제의 문제점
민주주의 정치에서 이익과 사상이 대립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대립으로 지새워서는 나라의 발전도 안정도 없다. 이것을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방식이 정치이고, 공평하게 하는 것이 민주주의 정치다. 민주주의란 대립에 앞서 대립하기위한 규칙에 대한 합의다. 하지만, 한국정치의 특징은 민주주의 규칙보다는 강한 정당의 규율을 통해 격렬한 대결을 생명으로 하는 정치다. 이념과 가치에 따른 정당적 질서가 약하기 때문에 건전한 정책적 경쟁구도가 불가능한 상태가 되면서 인물 중심의 사당적 요소와 함께 지도자의 연고에 기반을 둔 지역주의에 기초해 있기도 하다. 그래서 실질적인 책임정치를 구현하기위해 정치와 정책의 실패를 문책하려고 해도 지역주의라는 보호막에 의해 심판이 불가능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무조건적 지지기반을 가진 정치인과 정당에 의해 극단적 대결정치를 펼쳐도 유권자로부터 심판받지 않는 악순환의 안정적(?) 구조를 가지고 있기에, 한국정치 전반에 극단적 대결과 일방주의가 나타나는 것이다. 국회의원의 자율성과 독립성은 구두선에 불과하고, 끊임없이 당론을 관철시키는 상의하달의 명령체계가 작동하고, 대화와 타협보다는 숫자로 밀어붙이는 일방적 투표가 횡행해도 여당은 손해가 없다. 이에 맞서는 야당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원내의 심의와 협상보다는 장외 투쟁을 제일 전략으로 할 수밖에 없다. 흔히 국민들이 국회의원을 만나면 부탁하는 말이 있다. “국회에서 싸움, 그만 해라!”라고 말해도 소용이 없고, 야당의원은 그 말을 따를 수도 없다. 결국 정치적으로 타격을 주어, 결과적으로 여당의 실정을 부각하여 선거에서 승리하는 길이 유일한 해결 방법이므로 의회에서 격렬한 투쟁을 유발할 수밖에 없다.
한국헌법에 의하면 국회는 정치의 중심이 아니다. 대통령이 제안하는 법과 정책을 통과시키는 역할을 한다고 해서 입법부라 하지 않고, 자조적으로 통법부로 부르기도 한다. 한국의 집권당 국회의원은 입법부의 일원으로 행정부를 ‘견제’하는 역할도 해야 하지만, 동시에 대통령을 정점으로 하는 행정부의 원활한 국정운영의 수행을 위해 ‘지원’해야 하는 기능도 동시에 부여받고 있다. 숭실대 강원택 교수는 현실적으로 국정운영 지원에 더 큰 중요성을 부여하곤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민주적 정통성을 부여받는 또 하나의 기구로서 의회가 독자성을 유지하며 행정부에 대한 견제를 통한 상호 균형을 확보하기란 사실상 어려운 일이다. 또한 한국의 대통령제가 내각제에 나타나는 정당정부의 특성을 강하게 갖고 있다. 당정협의(회의)도 내각제적 요소이다. 한국은 정당정치의 영향력이 강하고 당의 규율도 강하다. 대통령의 정책으로 인해 발생하는 갈등을 정당소속과 별개로 개별 의원들과 설득, 타협, 거래를 통해 해소할 수가 없다. 여당과 야당간 극단적 대립이 존재하는 상황에서는 결국 정국 교착, 정파적 경쟁의 격화, 정책집행 능력의 약화 등의 정치적 불안정이 필연적이다.
한국정치체계로 볼 때, 대통령이 정치를 잘못하고 있는데, 정작 욕은 국회, 국회의원이 먹고 있다. 국민이 가장 신뢰하지 못할 집단으로 압도적 다수가 국회의원을 지목하고 있다. 참으로 억울하기도 하겠다. 대한민국헌법은 대통령중심제이다. 대통령제는 승자가 독식하는 체제다. 소위 제로섬 게임(Zero sum game)이라고 할 수 있다. 대통령이라는 권력만 본다면 승자독식이지만, 3권 분립에 따라, 국민은 국회의원도 직접 선출하여 ‘이원적 정통성’을 부여하고 있다. 행정부와 입법부가 견제와 균형을 이루는 것이 대통령제의 원리다. 87년 6월항쟁 이후에 등장한 정부는 한결같이 여소야대(與小野大)의 상황이 벌어졌다. 대통령제의 원조인 미국도 비슷한 경향성을 띠고 있다. 그래서 많은 정치학자들이 고민해 온 분점정부(Divided Government, 대통령제 하에서 여소야대의 상황이 발생했을 때, 행정부는 여당이 의회는 야당이 분점하고 있다는 의미)에 의한 통치력의 약화와 정치적 불안정을 걱정하고 있었다. 숭실대 강원택 교수도 분점정부에 대한 극복 방안에 대한 연구를 발표한 바 있지만, 지금처럼 오히려 절대 다수 여당이 탄생함으로써 발생한 독점정부에 대한 연구는 극히 없다. 군부독재시절의 절대 대수와 민주주의 시대의 ‘절대 다수’는 분명 달라야 하는데, 한국의 현실에서는 과거에로 복귀가 현실화되고 있다.
지금 우리나라는 절대 권력이 등장했다. 한나라당은 대통령과 절대다수의 국회의원들과 지방자치의 82%를 장악하고 있다. 3김 정치를 끝으로 사라졌던 ‘제왕적 대통령’이 다시 부활하고 있다. 제왕적 대통령은 베트남전의 확전이나 예산 집행의 독선, 워터게이트 사건의 닉슨 대통령 시절 행정부의 권한이 지나치게 강력해지는 것을 비판한 표현으로 73년 슐레징거의 저서 <제왕적 대통령>에 처음 등장했던 용어다. 또한 미국형 대통령제를 수입한 나라에서 입법과정을 포함한 국정운영 전반에 대한 대통령의 권한이 강하면 강할수록 그 체제는 정치위기에 더욱 취약하다(린쯔와 발렌주엘라 1995:39)는 연구 결과도 있다. 제왕적 대통령의 말년은 미국도 한국도 불행했다. 제왕적 대통령이 오만과 독선에 빠져 사회적 합의를 파괴하고 일방적인 정책을 시행하려고 할 때, 불행으로 종말을 맞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제왕적 대통령에게 오만과 독선에 빠지게 하는 요소가 또 하나 있다. 바로 ‘단임제’다. 단임제 대통령은 임기 중 재선을 의식하지 않고 소신껏 일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지만, 국민의 정치적 평가의 대상이 되지 않기 때문에 자의적이고 독단적으로 정책을 수행할 가능성도 동시에 존재한다(강원택). 이명박 대통령의 경우에도 세종시 수정안이나 4대강 사업의 강행에서 이것을 명분으로 내세웠다. TV에 출연하여 “자신의 임기 내에 해택을 볼 일도 아니기에 내버려둘 수도 있지만, 국가의 대계를 생각해서 한다.”고 해서 마치 국민의 지지도에서 볼 때, 손해를 감수하면서도 대승적 결단을 내리는 것처럼 포장하고 있다. 그런 측면에서 후임의 꿈을 꾸고 있는 ‘박근혜’의 입장에서 볼 때, 일방적 결정에 반발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또한 미국의 역대 대통령과 의회관계에서 살펴 볼 때, 대통령 후보가 유세기간에 제시되지 않은 이슈를 입법화하기 어렵다는 사실이다. 세종시 문제는 바로 여기에 해당한다. 국민 앞에서 “반드시 세종시를 건설하겠다.”는 약속을 하고 2년이 다되어가는 시점에서 갑자기 번복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세종시 문제가 단순히 정책상의 문제가 아니라 사적 권력투쟁의 요소가 되고 있는 것은 이런 사안이 쟁점화 되는 과정에서 증명되고 있다. 이번 ‘세종시 수정론’이 등장하는 과정을 보면, 이명박의 오기정치도 작동하고 있지만, 차기 대통령 후보로 성장하고 싶은 정운찬 총리의 야심과 깊은 관련이 있다. 정운찬 총리가 세종시를 백지화시키는데 일등공신이 되면 정치적 지지세력이 형성될 것이고, 향후 정치적 밑천이 될 것이라는 악마의 유혹에 빠지지 않고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여당 내부의 권력투쟁의 결과가 어떻게 진행될지 모르지만, 이명박 대통령의 경우, 세종시 수정안이 일차적으로 승리를 거둔다고 해도, 2010년 지방선거를 통해 ‘박근혜 의원’이 한나라당의 실질적 주인이 된다면, 대통령으로서는 탈당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민주화 이후, 역대 대통령은 임기 후반기에서 모두 탈당한 전례가 있는데 이명박 대통령도 예외가 되지 않을 것 같다.
이처럼 제왕적 대통령은 정치게임을 중심으로 사고할 수밖에 없다. 제왕적 대통령이 국민과 소통하지 않고 구중궁궐의 파워게임으로 이슈를 풀어갈 때,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는 격언처럼 내부에서 붕괴의 조짐이 형성될 것이다. 사회적 자산인 ‘신뢰’가 줄어들고, 특히 정당, 정치인에 대한 국민신뢰도가 최하로 떨어지는 악순환 고리를 끊기 위해서는 정치지도자의 절대적 성찰이 필요하다. 우리 국민들은 지난 해 촛불시위를 통해 정치지도자와 한국정치체제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소통의 문제와 함께 대의민주주의에 대한 깊은 회의였다. 비록 촛불시위가 ‘거리의 정치’ ‘운동의 정치’로써 한계를 확인하긴 했지만, 시민들의 폭발적인 참여욕구가 확인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자신의 삶과 직결되는 문제에 대해 강력한 직접 참여를 요청하고 있다. 정치권은 시민들의 바람을 해결할 제도적 수렴방법을 연구해야 한다.
4. 대안은 무엇이며, 어떻게 할 것인가?
이명박 대통령은 8일 한나라당 전국시도당위원장 만찬에서 “지금은 인기가 좀 없을 수 있어도 다음 정권이 현재 처한 문제점을 극복하고 승승장구할 기초를 닦아야 한다는 의무를 다하려한다”고 말해 세종시와 4대강 등 국정 현안을 정면 돌파하겠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이런 일을 하기 위해 내가 대통령이 되지 않았나 하는 확고한 생각을 갖고 있다”면서 “3년 뒤 정권이 바뀔 때 우리가 어떻게 평가받을지도 생각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명박 대통령은 브레이크 없는 불도저의 본성으로 돌아갔다. 제왕적 대통령으로서 사회적 합의를 파괴하고 갈등을 일으키고 대결을 벌리고 있다. 이에 맞서야 하는 시민사회는 촛불시위 이후 잠복기에 접어든 내부 사정에 따라 실천적 저항프로그램을 내놓을 수 없고, 10. 28일 재보궐선거같은 정치적 계기에 투표로 의사를 표현할 뿐이다.
민주당은 예산안을 가지고 투쟁을 벌이고 있지만, 전방위적 공세에 역부족이다. 정세균 대표가 KBS 라디오로 방송된 정당대표 연설을 통해 “4대강 예산을 4조원만 삭감해도 줄어든 민생 예산을 늘릴 수 있다”며 명분싸움을 하고 있지만, 한나라당은 국회 소관위원회에서 일방적으로 통과시키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은 야당대표의 호소에 아랑곳하지 않고, “국회가 새해 예산안을 빨리 통과시켜 줘야만 정부가 1월부터 예산집행을 할 수 있다”고 하면서 조기통과를 압박하고 있을 뿐이다. 대통령학 연구의 권위자인 리처드 뉴스타트 교수에 따르면, 대통령이 행사할 수 있는 가장 큰 입법 수단은 설득력이라고 한다. 미국의 대통령이 국회의원들에게 직접 호소하거나 대중적 압력을 통해 의회에 뜻을 관철할 때 활용했던 수단이 바로 설득력인데, 이명박 대통령은 ‘대통령과의 대화’에 나와서 대중적 설득력을 얻기는커녕 가짜 보고서나 흔들고, 검증도 되지 않은 ‘로봇 물고기’로 사기나 치고, 관료들의 궁색한 변명 논리에 빠져서 허우적거릴 뿐이었다.
이완구 충남 도지사가 세종시 문제로 사퇴하면서 이제 1단계라고 했다. 2단계는 수정안을 입법하는 것이고, 3단계는 내년 지방선거, 4단계는 2012년 총선과 대선, 5단계는 다음 정부의 선택이라고 했다. 세종시 문제는 단기전이 아니라 장기전이며, 이 정권에서 끝나는 사안이 아니라 다음 정권까지 맞물려있는 쟁점이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단순히 대통령 개인의 결단이나 리더십의 문제만도 아니고, 한국사회의 이념지형과 갈등, 정치체제와 지도자의 철학과 리더십, 그리고 시민사회의 성숙도와 역량 등 총체적인 문제이다. 그만큼 문제 해결의 대안과 방법도 단순할 수가 없다. 아주 거대한 철학적 담론에서부터 세세한 전술적 대안까지 살펴보기로 하자.
1) 공화주의적 국정운영의 철학을 확산하자!
세칭 ‘코드인사’로 통하는 ‘고소영, 강부자 내각’이라는 비판도 승자독식이라는 대통령제와 자유주의 관점에서 보면 타당하고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한국 국민들은 편중인사에 대해 찬성하지 않는다. ‘인사가 만사’라고 하는 오래된 공통인식도 있지만, 선거에 승리했다고 패배한 지역의 세력을 일방적으로 배제하는 정치에 대해 비판적이다. 우리나라의 인사정책은 정당정치의 원리와 일정하게 배치된다. 책임정치의 원리에 적합한 인사정책보다도 공화주의적 인사정치에 더 친근하다. 지역편중 인사는 과도한 사회적 배제로 인식되고 특정세력에 의한 오만과 독선적 국정운영으로 비판하게 되는데, 이것은 기본적으로 공화주의 인식이 보편화되어 있기 때문에 성립된다. 공화주의적 관점에서 해석한다면 편파인사는 공동체 내부에서 파벌과 정쟁을 격화시키기 때문이다. 국가 공동체 전체의 안정을 위해 더불어 함께하는 인사를 요구하는 것이다. 공화주의 기초가 형성된 유럽사회가 일찍이 ‘복지사회’ 구축을 사회적으로 합의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공공선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국가모델을 정립할 수 있을 것이다. 연세대 김호기 교수에 따르면, 보수세력이 꿈꾸는 한국의 미래는 ‘리틀 아메리카’이고, 진보세력이 꿈꾸는 한국의 미래는 ‘빅 스웨덴’이다. 일방적으로 한쪽의 세계로 끌고간다고 국가모델이 성공할 수가 없다. 한국적 상황에 맞는 한국적 표준을 세워야 한국형 국가모델이 나오는 것이다.
한반도 대운하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한반도 대운하’는 선거공약의 하나로 당선을 통해 승인받았다고 주장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 국민들은 이명박 대통령이 취임한 후, 여론조사에서 한반도 대운하에 다수가 반대했다. 자유주의 원칙에 따라 선거에 승리한 정치세력으로써 고집스럽게 집행하겠다고 하면, 공동체의 공화는 깨지고, 정치적 대결주의로 치닫게 된다. 연세대 박명림 교수는 우리사회에 공준(公準)이 필요하다고 한다. 공동체가 합의하는 공공선에 기초하여 법과 공공의 이익을 추구한다면, 극단의 정치대결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공화적 원리를 도입한 헌법의 예로 미국헌법을 든다. 삼권분리, 양원제, 연방제, 공론의 활성화 등을 통해 기구와 기구, 권력과 권력이 대화와 타협을 통해 사회적 합의와 공공선을 추구할 수 있도록 했다. 작년의 촛불집회처럼 공동체 내부의 시민들이 직접 참여해서 공통의 문제에 대해 공론을 모아가는 공론민주주의를 발전시키는 끊임없는 노력이 절대로 필요하다. 대한민국 공동체의 연대를 보여준 사건은 2007년 태안기름유출사건 이후 100만 명이 넘는 자원봉사자들의 활동이었다. 이처럼 우리사회는 공공선에 대한 합의와 갈망이 있다. 이것을 확장해 나아가야 한다.
2) 제대로 된 헌정주의를 세우자!
기본적 정치제도에 대한 주요 정치세력의 합의가 안정과 발전에 기본적 조건이다. 국회의 운영에서 극한적인 대립의 양상이 나타나고, 국정운영의 협의보다는 명분 축적을 고려하여 힘의 다수를 행사하는 표결이나 거리로 나가는 장외투쟁이 반복하고, 정치적 타협보다는 극단적 대결을 불사하면서 헌법재판소로 정치적 사안을 가져간다. 그런데 요즘 진보세력은 ‘헌법재판소’하면 부정적 인식을 대부분 할 것이다. 한국에 헌법재판소제도가 도입된 것은 87년 6월 항쟁의 성과였다. 지난 20년 동안 국민의 기본권을 신장시키는 판결이 다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태생적인 한계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헌법 재판관의 자격이 법관으로 한정되어 있어 국민다수를 대표하지 못하며, 3부에서 각각 추천하는 것도 헌법정신에 맞지 않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헌법재판소 자체의 기득권을 지키는 관료적 경향이 나타나고 있으며, 정치적 사안에 무원칙하게 개입하거나 눈치 보기를 하는 고도의 정치를 시작하고 있다.
유럽의 헌법재판소는 의회 다수결주의에 대한 헌정주의 산물이다. 중요한 것은 유럽의 사례를 조사해 보면, 아주 다양한 양식이 존재한다. 한국의 헌법재판소는 특수한 형태에 가깝다는 사실은 알 수 있다. 유럽은 정치세력들이 헌정주의의 원칙을 내면화하고 있고, 정치세력은 사실 의회를 통해 재판관 임명과 선출을 손에 쥐고 있다. 또한 여야가 돌아가면서 집권하기 때문에 양자 모두 정치적 게임에서 중립적 심판의 필요성을 공감하고 있기 때문에 정치적 편향은 거의 없다. 우리나라 정치상황에서 여야의 대립이 극심하여 헌법재판소의 판결이 점점 중요해 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편중된 구성과 계급적 한계, 정치적 재고 등으로 정치 세력 간의 갈등과 대립을 조정할 권위를 확보할 수 없다. 지금 이대로 두어서는 곤란하다. 여러 가지가 헌법개정사항이긴 하지만, 최소한 헌법재판소법이라고 개정하여 실질적인 헌정주의를 구현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3) 사회의 균열과 갈등을 수렴하는 사회적 협력체제를 형성하자!
한국은 OECD 27개 국가 중에서 갈등관리의 경제적 비용이 4번째로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사회의 모든 경제적, 정치적 주체들이 단기적 이익에 집착하고 있기 때문에,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갈등을 해소할 수 있는 신뢰와 권위를 가진 기구나 기제를 발견하기 어렵다. 그래서 새로운 정부-기업-시민사회의 3자 협력체제가 절실하게 필요로 한다. 시민사회와 정부는 갈등의 당사자이기도 하지만, 협력자이기도 하다. 사안에 따라 갈등과 협력의 양면성을 가진 비판적 파트너십(Partnership) 관계다. 김대중 정부시절, ‘열린정부’를 표방하면서 과거 권위주의 시대의 주역이었던 정부가 시민사회, NGO, 기업들과의 불평등한 비대칭 관계를 털어 버리고 협력과 공존, 그리고 파트너십을 형성하려고 노력하였다. 2000년 동감댐 건설을 백지화하는 과정을 보면, NGO와 언론이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시민사회가 가지고 있는 전문성과 언론의 홍보기능이 결합하여 정부에 의한 환경영향평가의 문제점을 부각시키고, 민관 합동으로 구성된 조사위원회에서 객관적인 실사를 바탕으로 대전환을 가져오게 되었다.
자유주의자 후쿠야마가 개념화한 ‘사회적 자본으로서의 신뢰’(Social capitals) 형성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수위’시절 백서에 거론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종시 문제나 4대강 사업은 지루한 대립과 갈등을 거친 후, 사회적 자본으로서 신뢰를 탕진하고 파국의 위기가 다가올 때, 비로소 방향을 전환할 수 있을 것이다. 세종시 문제는 행정의 효율성만이 아니라 정부정책에 대한 불신의 비용, 시민사회와 정치권의 갈등 비용, 그리고 끝없이 번복되는 결정으로 실질적 집행비용의 문제를 당면하게 될 것이다. 간접민주주의에서 직접민주주의로 옮겨가는 패러다임 전환과정에서 거버넌스, 협치(協治), 협력체제가 부각되고 있었다. 중요한 정책 사안마다 이해관계자들과 정책담당자들이 소통할 수 있는 정책소위원회를 만들고, 장기적이고 포괄적인 정책방향에 대한 다양한 수준의 정책토론회와 심의위원회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 시민사회를 적대적 관계로 규정하고 모든 관계를 끊고 있기에 최소한의 비판적 파트너십도 불가능하지만, NGO의 본령은 정부를 상대로 공공선에 입각해 정책과정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정책적 대안제시보다 당장은 운동체 역할을 해야 할 정도로 탄압받고 단절되어 있지만, 시민들과의 연대를 다양한 방법으로 높여 나아갈 때다.
4) 선거에서 전면적으로 승리하는 길을 찾자!
결국 문제는 정치다. 결론은 선거에서 승리하는 것이다. 신자유주의 전도사임을 자임한 레이건 대통령 이후, ‘아버지’ 부시까지 장기집권에 성공하면서 전 세계적으로 맹위를 떨칠 때, 이것을 끊어낸 것은 무명의 빌 클린턴이었다. 덕분에 민주당은 12년 만에 정권을 되찾을 수 있었다. ‘아들’ 부시의 8년 집권을 끝낸 것은 오바마의 선거승리 덕분이었다. 시민들의 참여, 청원, 저항, 위헌재청을 통해서도 잘못된 결정을 바로잡을 수 없다면, 마지막 남은 것은 유권자의 심판, 즉 투표라는 정치행위를 통해, 정치를 바꾸는 것이다. 시민사회의 역량을 키우고, 야당을 성장시켰지만, 절대 다수의 독점정치가 계속될 때, 이것을 중단시키는 방법은 선거에서 승리하는 것이다.
그동안 국민들은 2006~7~8년 3년을 연속해서 한나라당에 압도적 힘을 몰아주었다. 대한민국을 변화시켜달라는 욕망을 한나라당에 투영해 보았지만, 그들은 역시 대한민국이 나아가야할 방향도 잘 모르고 무능할 뿐만 아니라, 권력의 힘으로 전임자를 죽음에 내몰고, 사익을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협잡꾼이며, 대화와 소통과는 거리가 먼 3류 양아치라는 진실을 알게 되었다. 이에 유권자들은 10.28일 재보궐선거를 통해 유권자의 심리기저를 보여주었다. ‘미운 놈’을 떨어뜨리기 위해 일단 ‘힘센 녀석’을 밀어주었다.
우선 민주당은 자만하지 말아야 한다. 민주당이 주인공을 맡은 주연이 아니라, 한나라당이 주연이었기 때문에 재미없는 영화에 연기도 못하는 주연보다는 옆에 있는 조연이 그래도 좀 낮다고 봐준 것이다. 민주당이 지금은 조연이기에 면책되는 사항이 많지만, 만약 주연으로 평가받는다면 한나라당에 비교우위가 있다고 장담할 수 없을 것이다. 내실있는 실력을 준비하지 않으면 당면의 선거에서 승리한 이후에 다음 선거에서는 급전직하로 추락하는 현상을 반복하게 될 것이다. 국민참여당(준)도 민주당의 한계를 지적하는 것으로 자신의 존재근거를 삼을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가진 비전과 실력으로 당의 존재가치를 증명해야 할 것이다. 또한 민주노동당, 진보신당은 한국적 현실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유럽의 모델을 수입해서 팔 생각을 할 것이 아니라, 한국 실정에 실사구시하여 제품을 내놓아야 할 것이다. 그동안 신생회사의 제품이라서 안 팔린 것이 아니라 제품의 품질이 균질하지도 않고, 대부분 조악해서 안 팔렸다는 것을 냉정하게 인정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야당이 한나라당을 압도하려면, ‘연합정치’를 추진하는 길밖에 없다. 한나라당은 전통적으로 33%의 지지도를 가지고 있으며, 민주당은 27%의 지지도를 가지고 있고, 기타정당은 잘하면 8%내외의 지지도를 가진다. 한나라당을 선거를 통해 심판하려면 특별하게 대응하는 방법밖에 없다. 유럽이나 일본 등의 예에서 보듯이 정치적으로 다양한 세력이 존재할 때는 연합정치를 해야 한다. ‘연합정치’를 과거의 민주대연합이라는 민주당 패권주의에 기초한 ‘후보단일화 전술’로 단순화하면 안 된다. ‘연합정치’의 핵심이 반MB노선이거나 반한나라당 노선으로 안티테제로 성립해서는 안 된다. ‘연합정치’는 한국사회가 나아가야 할 미래비전을 만들어가는 과정이자, 결정체여야 한다. 지금부터 풍부한 정치적 상상력을 발휘해 보자!
5) 민주시민의 역량을 강화하자!
참여연대 신진욱 교수는 ‘시민정치운동’을 벌려야 한다고 했다. 2년 주기로 찾아오는 선거에 올인하여 성과를 내려고 하기보다는 장기적으로 시민사회의 정치적 역량을 강화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는 지적이다. 시민들은 촛불정국, 미디어법, 4대강 사업, 세종시 백지화를 거치면서 한국사회를 완전히 새롭게 인식하는 계기를 얻었을 것이다. 양극단으로 분열된 사회, 사익집단화된 정치, 지식인, 연구소의 변절과 이익추구, 사회적 공론장의 역할을 포기한 언론 방송 신문집단, 사회적 연대정신과 거리가 먼 대기업노조들의 존재를 새롭게 알게 되었다. 87년 민주화운동 이후, 진보의 편에 있다고 생각했던 사람들과 집단이 먼저 자기반성과 성찰을 해야 한다. 민주화의 기득권은 없었는지 뒤돌아보고 점검하여 대오를 바르게 해야 한다. 다니는 기업의 규모에 따라 연봉과 처우가 달라져 있는 대기업 노동자와 노조는 우리사회의 서민층을 이루고 있는 중소기업의 노동자, 비정규직 노동자, 청년실업자, 열악한 자영업자에게 공평하지 못했다는 것을 인정하고 연대의 새 틀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지금까지 상대방의 잘못만 크게 보고, 지적해 왔다면, 자신의 눈속에 있는 들보는 무엇인지 바로 보는 지혜를 가져야 한다. 우리사회의 운영원리에 공정성과 공평성의 철학을 녹아들게 해야 한다. 그래야 대한민국이라는 운명공동체에 깃든 분열의 상처를 씻어내고 ‘국민통합’이라는 희망의 새살을 돋게 할 수 있을 것이다.-끝-
***이글은 12월 10일 '민주통합시민행동' 포럼에서 토론할 발제문입니다. |
|
|
|
댓글 2개
엮인글 쓰기
|
|
|
| 1 | 2 | 3 | 4 | 5 | 6 | 7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