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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천제도1] 토니 블레어의 사례로 본 영국 노동당의 공천제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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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3018) | 추천 (0) |점수 (0) | 2009-06-24 19:15:36 김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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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니 블레어.jpg, Labour_Party_2007.pn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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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천제도1] 토니 블레어의 사례로 본 영국 노동당의 공천제도
- 김두수(사회디자인연구소 상임이사) -
사람이 어떤 선택을 할 때, 대부분 큰 대의명분에 따라 결정을 한다. 누가 보아도 그 결정이 타당하다고 수긍이 가는 경우가 많지만, 간혹 이해가 가지 않는 결정이라고 생각되는 경우도 있다. 정치활동 과정에서 두 번 이런 경험을 하였다. 한번 경험은 열린우리당 시절에 민주당과 합당문제였다. 151석이라는 과반 의석을 가진 정당에서 9석을 가진 민주당과 합당을 총선이 끝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시점부터 주장하는 것이다. 민주당은 9석 중에서 전남에서 겨우 5석의 의석을 가졌고, 나머지는 비례대표였다. 민주당과의 합당 주장은 정치개혁을 통한 전국정당의 기틀을 갖추고 막 시작하는 시점에서 확 김을 빼버리는 효과가 있었다.
또 한 번은 열린우리당 당헌에 명시되어 있는 공천제도가 현역 국회의원에게 대체로 유리한대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공천제도의 변경을 요구하는 것이다. 처음에 만든 당헌이 우여곡절 끝에 변경되었지만, 차기 선거에서는 당헌대로 적용되지 않고, 전혀 다른 방식인 공천심사위원회에서 하향식으로 공천되었다. 이러한 두 번의 경험을 통해서 무엇 때문에 이렇게 결정하게 되었는지 생각해 보았다. 아주 단순화하면, 그것은 공천문제였다. 민주당과의 합당은 공천되기만 하면 당선되는 가장 안전한 시스템을 만드는 길이었고, 공천관련 당헌을 끊임없이 손보는 경우는 현역은 무조건 공천되는 제도를 만드는 길이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정치인에게 공천문제는 눈에는 잘 보이지 않는 숨겨져 있는 인계철선같은 존재다. 무심결에 이것을 잘못 밟거나 건드리면 대폭발이 일어나고 만다.
그래서 이번에는 당대당 통합이나 대통합에 얽혀있는 실질적인 문제인 국회의원 공천문제를 본격적으로 검토해 보고자 한다. 공천문제는 각 나라의 사정에 따라, 정당제도에 따라 많은 차이가 있지만 각국의 사례를 비교 검토해 보고자 한다. 영국의 사례와 미국의 사례 그리고 한국의 사례로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그 첫 번째 시리즈로 토니 블레어가 영국 노동당 입당과정에서 공천을 받아 국회의원에 당선되는 과정을 살펴보고, 몇 가지 교훈을 찾아보자. 영국 노동당의 특징과 선거제도의 특징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토니 블레어의 사례는 당대 출판사에서 1997년에 출간한 ‘토니 블레어-영국의 새로운 미래(Tony Blair-The Moderniser)’에서 참고했음을 밝히면서 시작하고자 한다. 블레어는 1953년 5월 16일 에든버러에서 출생하여 옥스퍼드대학 세인트존스 칼리지를 졸업했다. 75년 가을, 대학을 졸업하고 변호사 시험을 준비하면서 런던으로 이주했다. 그가 살던 곳인 런던 첼시 지구당 관내 레드클리프 구역에서 노동당에 입당했다. 당시 노조원만 입당하던 시기라 여러 가지 과정을 거쳐 일단 입당하고 몇 년 후에 운수노조원으로 가입했다고 한다. 초기 소극적이었으나 지역책임자의 독촉과 격려로 1년 동안 총무로 열심히 일했다. 1년 뒤 76년에 변호사 시험에 합격하여 이후 6년 동안 변호사 활동을 하였다.
토니 블레어의 전기를 보면, 79년 5월 3일 총선에서 노동당이 대참패를 한 직후에 국회의원 출마를 통한 정치입문을 결심했다고 한다. 노조와 노동당에 영향력이 있는 어빈 변호사 사무실에 취직을 하여 정치계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노동당이 총선에서 패배한 후, 당내 얼치기 좌파들의 책임자 인책론으로 우왕좌왕하고 있을 때, 정치적 입문의 계기가 왔다. 당내 좌파들은 총선패배 원인으로 인책론을 제기하고 당내 민주주의를 요구했다. 첫째, 모든 하원의원을 임기마다 재선출한다. 둘째, 당총재 선거에 운동원(지명 대의원)이 참여한다는 요구를 했다. 일견 민주적 요구로 보이지만, 이것은 당시 지구당을 장악하고 있는 극소수 운동원이 전권을 갖는다는 의미였다. 국회의원 중심의 총재선거에서 운동원 중심으로 바꾼다는 것은 극적인 변화로 보이지만, 일반적인 유권자의 정서와는 거리가 먼 좌파들의 놀이장으로 변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평범한 시민의 정서를 가진 사람들은 떨어져 나가고, 의원들에게 적대적인 일반관리위원회가 주도하는 운동원(지명 대의원)만 남게 된다. 지구당을 장악한 좌파가 배신자로 낙인찍힌 의원의 기소자이자 집행자가 되어버리는 구조가 양산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당내 민주주의 요구는 상당한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정책적으로 절대 뜻을 모을 수 없는 세력들이 인책론으로 규합되었다. 그 과정에서 이러한 좌경적 오류를 비판하는 세력들이 모여서 ‘사회민주당’을 창당하는 분당 사태가 발생했던 것이다. 노동당내에 이러한 좌파 연합으로 알려진 밀리턴트(극좌분파)의 당내 추방에 법률적으로 조언하면서 당총재인 마이클 풋과 인연이 닿았다. 이 파문으로 노동당을 좌지우지하던 지도자들과 접촉하면서 좋은 인상을 남겼다고 한다.
그래서 80년 3월 29일 결혼하고 런던의 해크니 지구당에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신입당원에 대해 그리 호의적인 환경은 아니었던 것 같다. 지부의 책임자가 기록했겠지만, 퀸스브리지 구역의 서류에는 구의원 공천을 노린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그러나 구역의 고참들이 그들 풋내기로 보고, 공천받기 위해서는 지구당에서 더 봉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대의원들은 그를 사회민주당보다 조금도 나을 게 없는 용납할 수 없는 우익으로 보았다고 한다. 81년은 노동당에서 개혁을 주장하는 4인방이 탈당하여 ‘사회민주당’을 새로 창당한 시기로 노동당을 대신하는 제1야당의 자리를 위협하고 있던 시기였다. 그래서 노동당은 더욱 좌경화의 과정을 겪고 있던 시기라 당내에서 전통적 입장에 지지하지 않는 인사들은 우익으로 몰리는 시기였다.
해크니 지구당에서 빛을 보지 못하고 있는 때에 드디어 기회가 왔다. 82년 5월 런던 교외 버킹엄셔 비컨스필드 보궐선거가 발생했다. 이 지역은 보수당 우세를 투표용지를 세지도 않고 무게로 달아서 확인한다는 곳이다. 게다가 당시 대처의 인기가 하늘을 찌르고, 포클랜드 전쟁 기간에 실시한 보궐선거였다. 당시에 유행하던 전투적 표현에 의하면 포화 속에서 격추됐다. 그것도 자유당 후보에게도 뒤진 3등으로 참패했다. 공탁금도 반환받지 못하는 초라한 성적이었다.
대처에 의해 총선이 예상되자, 83년 비컨스필드에서 재출마하라는 권유를 사양하고 당선 가능성이 높은 선거구를 물색하고 다녔다. 여기저기 닥치는 대로 지원했으나 별 성과가 없었다. 5월 6일까지 대부분의 지역구에서 후보가 결정되자 블레어는 크게 낙심했다고 한다. 그러나 영국 북동부에 자신의 출생지와 몇 마일 떨어진 세지필드 지역의 후보가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세지필드는 과거에 주로 탄광지역이었고, 석탄산업이 사양길에 접어든 전형적인 시골이었다. 선거구에 27개의 마을이 있었다. 다행히 세지필드는 좌파의 극단적 주장을 수용한 적이 없는 곳이었다.
세지필드는 선거구 획정위원회에서 신설된 선거구로 현역 의원이 없었다. 그러나 레스 헉필드, 레그 레이스라는 2명의 좌파 정치인의 경쟁무대였다. 블레어가 찾아보니, 트림든이라는 작은 마을 노동당 지부 하나가 아직 아무도 공천하지 않았다. 지부 책임자이자 선거인단의 일원인 존 버튼에게 전화하여 면담을 요청하였다. 지부에 찾아갔을 때, 당원들은 축구경기를 보고 있어서 연장전 경기가 끝날 때까지 쥬스잔에 입을 대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당원들과 토론이 시작되었다. 그는 추천을 받기 위해서 질문자의 의도에 부합하는 답을 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좌파 당원의 집요한 질문에 동의하지 않고 소신껏 답변했다. 유럽 공동시장에 참여하고, 당내 극좌파(밀리턴트)를 추방하고 당의 민주화(좌경화 노선)를 최우선으로 주장하는 베나이트식 변화를 반대한다는 견해를 밝혔다. 질문을 했던 좌파 당원도 동의를 했다고 한다. 모든 것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블레어를 밀어주기로 즉석에서 결의를 했다. 그래서 후보명단에 이름을 추가할 수 있었다.
지구당 집행위원회를 장악한 좌익과 노조원들은 블레어를 거부했다. 1차 관문통과에 실패했지만, 다음날 저녁에 열리는 직능 대표자 전체회의에 도전했다. 후보로 이름을 추가할 것인지 의견이 분분할 때, 런던 운수노조가 공식적 지지자인 레스 헉필드보다 블레어의 손을 들어 주기 위해 헉필드가 당황하게 할 수 있는 세부적인 질문을 했다. 그래서 블레어는 전국 노동운동에 많은 적을 가지고 있었던 헉필드를 반대하는 운동의 수혜자가 되었다. 그리고 추천 구역의 책임자인 버튼이 당시 당총재였던 마이클 풋이 비컨스필드 보궐선거에 패배한 후에 블레어에게 보낸 격려편지를 개봉하지 않은 채 보여줌으로써 대역전극이 펼쳐졌다. 83명의 총회회원들 앞에서 편지를 제시하면서 블레어가 세지필드에서 출마하라고 당총재가 인준하는 편지라고 하면서 블레어가 하원에 입성하는 것이 마이클 풋의 희망이라고도 말했다는 것이다. 이 편지는 공식적으로 인준하는 편지가 아니라, 낙선자에 대한 의례적 격려편지였다. 아무도 편지의 정확한 내용을 모른 체, 당총재의 외형적인 인준으로 많은 총회위원들이 흔들렸고, 표결이 시작되었다. 결국 표결 결과에 약간의 논란이 있었지만, 42대 41로 블레어의 이름을 추가할 수 있었다. 이름을 추가함으로써 강력한 경쟁자인 헉필드를 무너뜨리게 되었다. 지명은 형식적 절차만 남겨둔 상태가 된 것이다. 5월 20일 후보로 당당히 지명되었다. 그리고 20일 후 하원의원이 되었다. 벼락치기로 국회의원에 당선된 것이다.
83년 당시 선거유세내용은 과거 노동당 공약을 축소한 것에 불과했기 때문에 오늘날 블레어의 노선에서 볼 때, 기겁할 내용이 많았다. 노동당 정부는 5년 안에 200만개 신규고용을 창출할 것이며, ‘천연자원을 고갈시키고 실업을 심화시키는’ 유럽 공동시장에서 협상을 통해 탈퇴할 것이라고 공약했다. 생계비 지원을 50% 증액함으로써 독신 연금 생활자에게 한주에 1.45파운드씩 늘려 주겠다는 것과 크루즈 미사일과 트라이던트 미사일을 폐기하는 국방공약도 있었다. 그때 블레어는 너무 늦게 공천됐기 때문에 지구당 요원 한 사람이 당 강령을 그대로 베껴 썼으며 자신은 인쇄 전에 한 번도 보지 못했다는 설명으로 곤혹스런 입장을 피해갔다. 유럽공동시장 탈퇴문제와 핵반대운동을 했다는 경력을 제출했던 그는 보수당으로부터 두고두고 정치적 공격의 재료를 제공하게 되었다. 이후 당 현대화의 기수이자 당 강령을 개정하고 총선에서 승리하기 위한 당 정책과 충돌하는 당시의 공약은 영국 선거의 특수한 과정을 확인할 있다. 마침내 6월 9일 하원의원 당선, 8281표차 승리했다.
토니 블레어의 정치입문과 공천과정을 통해 몇 가지 시사점을 살펴보자. 첫째, 유럽정당의 전통을 확인할 수 있다. 흔히 유럽 정당의 특징인 당원중심 정당의 형태를 볼 수 있다. 그 중에서도 영국 노동당은 더욱 특수하다. 과거 노동당 의원 후보는 지구당 일반위원회가 좌지우지했다. 지구당의 일반위원회란 당 지부, 지역노조, 페이비언, 여성, 기타 소비조합 등 사회단체의 대표로 구성된다. 그 점에서 보면, 지부에서 대표를 뽑아서 지구당 지도부를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운동체의 연합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들 대표들이 1인 1표제가 도입되기 이전에는 지구당을 움직이고 의원의 활동을 감시하며 대의원을 선출하고 전당대회 결의안을 제출하는 당의 핵심 운동원이었다. 영국 노동당은 당원이 되려고 하면 조합원 자격이 있어야 하고, 창당의 기반이 노동조합이기 때문에 이러한 제도가 정착된 것을 알 수 있다. 그 후, 1인 1표제가 도입되어 이제는 지구당 당원들의 직접투표로 당총재와 국회의원 후보를 선출한다. 세지필드의 경우, 1993년 초 400명 선이었던 지구당 당원 수가 2년 만에 5배로 늘었고, 노동당의 전체당원도 20만에서 40만으로 2배 이상 늘었다.
둘째, 지구당의 각 지부가 후보를 추천한다는 것이다. 후보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지부의 추천을 받아야 한다. 각 지부에서 추천받은 후보들을 놓고서 지구당 집행위원회가 심사하고, 미흡할 때는 직능을 대표하는 전체회의에 재론한 것을 볼 수 있었다. 철저히 상향식 경선체제를 갖추고 있다. 자발적으로 추천을 받았든 당 중앙의 추천을 받았든 지역지부에서 추천절차를 거치는 상향식 경선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도시지역의 경우는 50여 지부에서 중복되기도 하지만, 각각 지지하는 후보를 추천하여 치열한 내부 경선을 거쳐서 공천자를 확정하기도 한다.
셋째, 당내 민주주의 문제를 재검토해 보아야 한다. 당내 민주주의가 계층적 중층적으로 이루어 졌을 때, 나타나는 폐단을 영국 노동당을 통해 볼 수 있었다. 또한 당내 민주주의가 당권투쟁의 도구가 될 수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열린우리당 시절에도 당의 표결권을 대의원에게 부여했을 때, 선출의 절차적 문제도 있었고, 그 대의원이 지역 유권자, 시민의 정서를 대변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도 있었다. 또한 마찬가지로 기간당원제도처럼 당원의 자격을 제한할 때도 발생하는 문제가 있다. 끼리끼리라는 폐쇄성과 조직 이기주의가 발동된다는 사실이다. 토니 블레어도 노동당 현대화 과정에서 당비문제를 중앙당이 50파운드를 내는 사람으로 제한하자고 했을 때, 가능한 금액만 내면 된다는 혁명적인 안을 제시한 것이다. 지금도 영국 노동당 홈페이지에 가보면, 일반, 청년, 학생을 구별하게 하고 가능한 금액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게 해 놓았다. 그리고 그 금액이 쓰일 수 있는 용도를 설명으로 부기하여 당비가 어떤 용도로 쓰이는 지 확인 가능하다.
넷째, 공약의 문제를 볼 수 있었다. 상향식 공천과정에서 당원 중에서도 극소수 간부의 눈치를 보면서 후보에 지명을 받게 되자, 유권자가 요구하는 공약으로 자신의 공약을 발전시키기 보다는 당의 강령에 따라가는 공약이 나올 수밖에 없다. 토니 블레어가 당혁신을 위한 현대화론자로 깃발을 올리기 10년 전이라고 했더라도, 그가 초기에 생각했던 문제의식을 공약으로 발전시키지 못한 것은 이러한 제도적 환경이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밖에 없다. 그런 측면에서 공천과정에서 당심(黨心)과 민심(民心)을 일치시키는 유연한 제도를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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