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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민주당 선언 비평 3 : 양극화 프레임을 버려야 민주당이 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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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3294) | 추천 (1) |점수 (5) | 2009-06-17 15:51:42 김대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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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극화 프레임을 버려야 민주당이 산다.
정견(正見)이 문제다 불교에서 깨달음의 경지로 나아가기 위한 실천수행 방법론이 팔정도(八正道)다. 그 출발은 정견(正見)이다. 올바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토니블레어가 노동당을 혁신하면서 수없이 강조했는지도 모른다. 한국 사회를 올바로 보는 것이 어려운 이유는 첫째, 한국 사회 자체가 ‘비동시성의 동시성’사회라는 통찰에서 보듯이 대단히 복잡하고, 다면적이며, 둘째, 알거나 말하면 다치는 불편한 진실이 많아 진실(깊은 속살과 바닥현실)에 대한 접근이 어렵고, 셋째, 진보와 보수의 주류가 피해의식에 찌들고, 성공신화에 눈이 멀고, 과도한 탐욕에 사로잡혀 세상을 바로 보지 못하게 하는 개념과 철학을 가지고 있고, 넷째 이론과 실물, 세분화.전문화된 각 영역간의 소통과 대화가 부족하여 하나같이 장님코끼리 만지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진보와 보수를 초월하여 주요한 난제 중의 하나가 자신이 발 디디고 살고, 개혁하려는 한국 사회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진보든 보수든 한국 사회를 바로 보지 못하니 획기적으로 개혁하려는 세력 일수록 욕은 욕대로 먹고, 성과는 별무신통일 가능성이 많다. 작년 촛불 시위 때, “이명박, 넌 제발 아무것도 하지마!”라는 구호가 꽤 넓은 공감대를 형성한 것은 눈과 귀는 멀었지만, 힘은 세고, 부지런하고, 과단성까지 갖춘 사람의 대역사(?)에 대한 우려이다.
참고로 팔정도는 다음과 같다. 불교도가 아니라도 자신을 비춰보는 거울로 삼을 만한 내용이다. ① 정견(正見):올바로 보는 것. ② 정사(正思:正思惟):올바로 생각하는 것. ③ 정어(正語):올바로 말하는 것. ④ 정업(正業):올바로 행동하는 것. ⑤ 정명(正命):올바로 목숨을 유지하는 것. ⑥ 정근(正勤:正精進):올바로 부지런히 노력하는 것. ⑦ 정념(正念):올바로 기억하고 생각하는 것. ⑧ 정정(正定):올바로 마음을 안정하는 것이다.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 뉴민주당 선언은 수많은 추상(抽象)적 개념으로 구성되어 있다. 당연한 일이다. 추상적 개념은 한자 뜻 그대로 특정 측면 혹은 주요한 측면은 뽑아내고 나머지는 버리는 편광안경이다. 편광안경이 불량이면 엉뚱한 것은 취하고, 정작 중요한 것은 놓친다. 그리고 취하는 내용이나 버리는 내용은 다 특정한 경험이나 연상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개념에 의해 마음이나 사고가 결정지워지는 측면이 큰 것이다. 개념(언어)에 의해 사물, 특히 정치사회적 현상은 재창조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정치사회 현상을 파악하는 개념들은 특정한 이데올로기나 특정한 정치사회 세력의 이해관계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개념(언어)의 이런 성질을 주목한 사람이 인지언어학-이는 무의식적인 마음의 작용을 통해 언어의 성질을 이해하려는 학문이다-의 창시자 ‘조지 레이코프’ 박사다. 그는 2000년, 2004년 연이어 미국 대선에서 민주당이 패배한 이유를 분석한 책,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를 썼는데, 그가 내린 결론은 사용하는 언어=프레임(frame)이 미국 공화당에 유리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 책의 부제는 ‘미국의 진보 세력은 왜 선거에서 패배하는가’ 이다)
조지 레이코프는 프레임이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형성하는 정신적 구조물”로서, 이를 재구성한다는 것은 “대중이 세상을 보는 방식을 바꾸는 것”이란다. 요컨대 자신이나 대중들이 다르게 생각하려면, 다르게 말해야 한다는 것이다.
양극화와 신자유주의 프레임의 마술 상당수 진보 세력이 한국 사회의 다양한 현상 혹은 핵심적인 모순.부조리를 설명할 때 즐겨 사용하는 개념이 양극화와 신자유주의이다.
양극화라는 개념은 계층(학력, 직능, 소득, 자산), 기업, 산업, 부문, 지역 등 경제사회 주체들의 격차가 커지고, 또 상하간 유동성이 떨어지는 현상을 지칭하는 개념이다. 이는 1990년대 들어 세계화(개방화), 지식정보화, 자유화의 파도가 밀려들면서 두드러진 현상이다. 양극화의 심각성을 보여주는 통계는 무수히 많다. 지니 계수, 소득 5분위 배율, 빈곤율, 정규직-비정규직의 소득격차, 수출기업-내수기업과 대기업-중소기업의 수익성 격차의 확대를 알리는 통계가 대표적이다. 여기에 입각하여 상당수 진보세력은 양극화 해소를 자명한 시대정신으로 간주한다. 자칭 진짜 진보세력으로부터는 우경화 되었다는 비판을 받고 있는 뉴민주당 선언 조차도 이렇게 단언한다.
"한국사회의 최대문제는 양극화 심화이다. 양극화 해소는 시대정신이 되었다. 계층 간 소득 및 부의 격차가 크게 확대되었다. 소득분배가 외환위기 이후 OECD 국가들 중 가장 나쁜 수준으로 악화 되었다. 양극화는 내수산업을 위축시킴으로써 궁극적으로 지속 가능한 발전의 장애요인으로 작용한다. 양극화는 사회통합을 저해하고 민주주의의 발전을 저해한다. 양극화 문제는 기본적으로 일자리 위기에 기인한다. IMF 외환위기 이후 일자리가 늘지 않고 있다. 여성, 청년, 노인 일자리 등 일자리가 태부족이다. 일자리의 질도 전혀 개선되지 않고 있다. 자영업 종사자는 취업자 4명중 1명이고 비정규직은 800만 명이 넘고 있다. 경제양극화 심화는 정치의 실패 때문이다. 정치가 양극화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자리 위기를 해결하지 못한 것도 정치의 실패이다. 시대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한 복지제도로 인해 소득격차가 커지고, 높은 사교육비로 인해 빈부격차가 대물림 되고 있는 것도 근본적으로 정치 실패에 기인한다. 새로운 경제사회의 틀에 맞는 시대적 과제를 해결할 수 있는 새로운 정치가 필요하다"
이는 뉴민주당 선언의 세계관, 가치관, 문제의식이 가장 집약적으로 드러난, 뉴민주당 선언의 정수에 해당되는 문장이다.
분명한 것은 보수든 진보든 양극화의 심각성과 각종 격차의 적정화(합리화)의 중요성을 부인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문제는 그 원인에 대한 진단과 해결 방안이다. 또 하나는 양극화가 어차피 ‘사물의 어떤 측면은 버리고 어떤 측면은 취하는’ 편광안경인 이상 그것이 버리는 것과 취하는 것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만약 이 편광안경이 국가, 사회적으로 매우 중요한 가치를 놓쳐버린다면, 또 이 프레임이 대중들의 심리와 사고에 엉뚱한(진보에 매우 불리한) 영향을 끼친다면 양극화라는 개념은 꼭 필요한 곳 아니면 쓰지 말아야 한다.
허수아비 때리기 먼저 진보가 내놓는 양극화의 원인에 대한 진단과 해결 방안을 살펴보자. 자칭 진짜 진보는 양극화의 원인을 압도적으로 워싱턴 컨센서스로 대표되는 신자유주의 경제정책 패키지 내지 신자유주의 경제시스템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개방화, 경쟁 강화=소비자 선택권 강화, (금융)자유화=규제완화, 시장화, 민영화, 유연화(노동 유연성 강화), 유동화(금융 유동성 강화), 감세, 복지축소 때문이라는 것이다. 당연히 그 해법은 신자유주의 경제정책 패키지를 거부하고, 신자유주의 경제시스템을 해체 하는 것이다. 물론 뉴민주당 선언은 신자유주의라는 말을 단 한번도 쓰지 않았다. 대신에 시장만능주의라는 표현이 3번 나오는데 이 말이 내포하는 의미는 신자유주의와 같다.
그런데 세상 만사는 과유불급(過猶不及)이다. 그 어떤 가치라도 지나치면 모자란 것과 다를 바 없다. 그러므로 시장만능주의든 경쟁만능주의든 국가만능주의든 모든 만능주의는 악이라고 할 수 있다. 신자유주의가 시장만능주의라면, 또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정부의 경제사회 정책이 시장만능주의라면 비난 받아 마땅할 것이다. 그것이 양극화의 주된 원인이든 부차적 원인이든 비난 받아 마땅할 것이다.
하지만 생산적 복지의 김대중, 동반성장-균형발전-복지강화의 노무현 정부는 말할 것도 없고, 이들을 좌파 정부로 몰아세웠던 이명박 정부조차도 시장만능주의로 뭉뚱그리기에는 석연찮은 점이 많다.
그래서 위에서 거론된 정부들을 뭉뚱그려서 신자유주의니 시장만능주의니 하면서 허수아비 때리기나 마녀 사냥을 할 것이 아니라, 신자유주의적 가치들이 특정한 시공간(역사적 상황)에서, 또 다양한 영역에서 어떻게 작동했는지를 따져보아야 한다.
그런데 신자유주의적 가치를 많이 구현했다고 하는 영국 마가렛 대처 정부와 토니 블레어 정부, 미국 클린턴 정부, 아르헨티나 메넴 정부, 브라질의 까르도수와 룰라 정부, 호주와 뉴질랜드의 노동당 정부, 마오쩌뚱 사후(1978년 이후)의 중국 공산당 정권의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성과를 긍정적으로 평가하지 않는 사람은 별로 없다. 비록 이전에 비해 소득격차가 커졌고, 따라서 양극화가 심화되었을 것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만약 이 정부들의 경제정책 패키지가 신자유주의가 아니라면, 김대중, 노무현 정부의 경제정책 패키지도 신자유주의가 아니라고 주장할 근거는 얼마든지 있다. 한나라당과 보수 세력은 김대중, 노무현 정부를 아예 좌파 정부라고 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이것만 봐도 신자유주의와 양극화 프레임은 한 정부의 성과와 성격을 진단하고, 사회적 현안의 우선순위를 내오기에는 너무나 문제 많은 편광안경(프레임)이라는 것을 짐작하게 해 준다.
한국 사회를 똑똑히 보라 이제 한국으로 돌아와서 한국이 처한 역사적 상황을 살펴보자. 한국은 소비자 선택권 이나 (공정하고 자유로운) 시장 원리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과소시장 영역이 광범위하게 존재한다. 이는 기본적으로 독과점, 각종 경쟁제한 장벽과 진입장벽, 실력보다 연고정실을 중시하는 문화가 주요하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독과점 시장, 공공부문, 대기업.공기업 생산현장, 청소년이 선망하는 직업(전문 자격증) 세계, 전임교수 세계, 부동산 시장, 재벌.대기업 중심의 먹이사슬, 재정과 자리를 둘러싼 먹이사슬(정치와 관료 세계)이 그런 영역이다. 이는 양반관료제, 식민통치, 분단과 전쟁, 국가 주도의 변칙적 산업화의 유산이자, 단기적이고 협소한 이익을 추구할 수밖에 없었던 후진적 노동운동의 유산이다. 이 영역에는 이른바 블레어와 클린턴 정부가 수용했던 신자유주의적 가치(시장만능주의가 아니다)가 절실하다. 지나치지만 않는다면 신자유주의적 가치가 진보이고, 개혁이고, 공공성을 담보한다. 적어도 과소시장(경쟁) 영역에 대해 신자유주의적 가치의 적정성을 시비하는 것이 아니라 그 가치 전반을 공공의 적으로 여긴다면 그것은 보수이고, 반개혁이고, 몰염치한 집단이기주의이다.
물론 한국은 적절한 규제, 감독, 보호 장치도 없이 가혹한 시장(경쟁) 원리가 작동하는 과잉시장(경쟁) 영역도 광범위하게 존재한다. 실업자, 영세자영업자, 비정규직, 장애인, 시간강사, 하청 중소기업, 무연고자, 청년세대, 미래세대의 세계가 그런 영역이다. 이 영역에는 지나치지만 않는다면 사민주의 내지 공동체주의적 가치가 진보이고, 개혁이고, 공공성을 담보한다. 이 영역에 대한 적절한 규제, 감독, 보호(배려) 조치는 상식이자, 현대적 자유주의(신자유주의)와 사민주의가 공유하는 가치라고도 볼 수 있다. 워싱턴 컨센서스에도 이런 정신은 면면히 흐르고 있다. 애초에 경쟁 기회, 조건, 출발선의 불평등이 현격한데 서 자유롭고 공정한 경쟁을 부르짖는 것은 현대의 자유주의에도 위배되기 때문이다. 사실 신자유주의, 시장만능주의, 양극화 극복을 시대정신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주로 보는 세계는 바로 이 세계이다.
양극화 프레임이 버리는 것 이제 양극화 프레임이 사고를 어떻게 조직하는지, 사물의 어떤 측면을 취하고, 어떤 측면을 버리는지 살펴보자.
양극화 프레임은 격차의 크기에 주목한다. 격차의 성격을 묻지 않는다. 그것이 자유롭고 공정한 경쟁의 결과인지 아닌지 묻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국은 먹자골목에서 고객이 줄을 길게 서는 식당과 파리 날리는 식당처럼, 자유롭고 공정한 경쟁(고객의 선택)에 의해 만들어진 격차도 있다. 세계화, 지식정보화, 교통수단의 발달, 소비자 선택권의 강화로 인해 이런 류의 격차가 다양한 분야로 확산되고 있다. 이는 경제발전의 필연적인 결과인데, 웬만큼 격차가 크지 않고서는 국가의 규제가 개입할 여지가 없다. 단지 세금 정책과 복지 정책으로 그 격차를 완충하고, 패자부활전을 도울 수 있을 뿐이다. 양극화 프레임은 이 문제를 선명하게 인식하고 해결을 추동하는 측면은 있다. 그래서 나름대로 유용성이 있는 프레임인 것이다.
또 하나의 격차는 정규직과 비정규직, 전임교수와 시간강사, 대형마트-중소 협력업체 관계처럼 전자가 자유롭고 공정한 시장(경쟁) 원리를 너무 배제하고, 자신들이 기여, 부담한 것에 비해 너무 많은 권리, 이익을 누리기 때문에 생긴 격차도 있다. 한국의 양극화의 상당부분은 이런 성격의 양극화다. 그런데 기존의 주로 신자유주의를 원흉으로 지목하는 양극화 담론은 이런 성격의 양극화를 거의 인식하지 못한다. 또한 노무현 전대통령의 가족의 부적절한 돈 거래에서 보듯이, 또 수없이 터져 나오는 국회의원 정치자금법 위반 사건에서 보듯임기가 4~5년에 불과한 계약직(비정규직) 공무원이자, 연금도 거의 없고, 퇴임 이후 사실상 취업 제한을 받는 직업 정치인의 보수를 30년 직업 공무원 생활한 사람의 보수와 비슷한 수준으로 유지하는 문제(너무 적은 격차의 문제)도 인식하지 못한다. 오세훈 같은 태생이 부자인 정치인과 나 같은 사람(공공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인생을 걸기에 나도 정치인이다)의 격차도, 현역 의원과 그에 도전하는 건달 정치인의 격차도 마찬가지다.
한국민들은 삼성전자 등기이사로서 이건희가 받는 고액 연봉과 주주로서 가져가는 거액의 배당금을 문제 삼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의 고급 취미 생활과 고급 주택 등에 대해서도 문제 삼는 사람은 별로 없다. 하지만 그의 불법적 비자금과 경영권 승계와 공정거래법을 어겨가면서 일삼는 가혹한 협력업체 약탈에 대해서는 분노하는 사람이 많다. 양극화 프레임은 이를 차별적으로 인식하지 못한다.
분명한 것은 국가는 자유롭고 공정한 경쟁 결과 일지라도 사회적 약자, 패자에 대해서는 사회안전망으로 포용해야 한다. 동시에 승자독식이 생기지 않도록 해야 한다. 만약 공정하지 않은 경쟁 결과라면 게임규칙을 바르게 정립, 감독하는 일이 급선무다. 그런데 양극화 담론은 대체로 사회적 안전망으로 약자, 패자를 포용하고, 세금을 통해서 부의 이전을 추구하는데 역점을 두고 있을 뿐이다. 한마디로 양극화가 강을 오염시키는 유해 물질이라면 그것이 발생하는 '상류'에서 할 일을 등한시하고, '하류'에서만 변죽을 올린다는 것이다. 실제 뉴민주당 선언의 실질적인 양극화 대책은 ‘시대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한 복지제도’ 개혁과 ‘중산층과 서민에 대한 즉각적인, 그리고 포괄적인 구제’이다. 성장을 강조했지만, 그 내용은 부실하고, 무엇보다도 국민들이 깊이 공감할 만한 내용이 없기에 사실상 복지만 강조했다고 할 수 있다. 전통적인 좌파의 해법을 쫓았다는 얘기다.
물론 양극화 문제를 하류에서 나마 해결하려면 높은 세금과 풍부한 복지 재정이 뒷받침 되어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세금과 재정 구조로 보면 이것이 쉽지 않다는 것이다. 따라서 시장, 경쟁, 양극화를 매우 격렬한 어조로 성토는 하지만, 실제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이 진보가 양극화가 시대정신이라고 주구장창 부르짖음에도 불구하고 가난한 사람들로부터도 별로 지지를 받지 못하는 이유일 것이다.
진보는 성적이 나쁠 수 밖에 없는 과목 한 두 개로 평가를 받으련가? 사실 지금 한국에서 양극화를 시대정신으로 여기고, 유럽 사회를 모범으로 삼는 정치세력은 항상 더 나쁘거나 별무신통인 성적표를 받을 수 밖에 없다. 세계화, 지식정보화, 중국 경제의 급부상으로 인한 구조조정, 한나절 생활권인 국토(수도권 집중), 국민들의 자유로운 선택의지와 경제적 기회에 역동적으로 반응하는 성질, 경제사회 주체들의 뿌리깊은 화전민적 경향, 조세 부담률을 쉽게 올릴 수 없는 조세 구조 등을 종합해 보면 그럴 수 밖에 없다. (참고로 한국은 전체 법인수 237,122개 중 상위 0.14%(324개)가 전체 법인세의 59.4%를, 상위 1.2%(2,843개)가 80%를 낸다. 소득세는 과세대상자의 상위 10%(실 납부자의 20%)가 80~90%를 낸다.게다가 방만한 공공부문도 증세의 발목을 잡는다.)
한마디로 진보가 양극화를 시대정신인양 떠들어댄다면, 성적이 나쁘게 나올 수 밖에 없는 과목 한 두 개로 자신의 학업 성적 전체를 평가 받으려는 학생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선생님과 학부모(유권자)는 양극화=격차축소라는 과목의 성적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다. 양극화 과목보다는 부의 절대량(성장률, 일자리),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정의 –더 많이 주어야 할 곳에 더 주고, 더 적게 주어야 할 곳에 적게 주는 정의-, 경제사회적 활력(희망), 사회적 최소한의 상향(빈곤 개선) 과목 등에 훨씬 관심이 많다. 그래서 인지 몰라도 양극화가 한국보다 훨씬 심한 중국은 양극화 담론을 최상위에 놓지 않는다. 아마도 대부분의 문명국들은 그럴 것이다.
민노당, 진보신당, 이들과 철학, 가치, 정서가 비슷한 주류 진보언론, 개념 없는 시민단체 등은 양극화 해소와 비정규직 축소를 시대정신처럼 여기는 것은 어리석긴 하지만 그런대로 봐 줄 수는 있다. 그래야 참여정부나 민주당 같은 ‘(진보적)자유주의’ 세력을 정치적으로 도태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 과정에서 양극화와 비정규직 문제에 대해 그렇게 높은 우선순위를 부여하지 않는 보수 세력의 성적을 높여 주기에 소탐대실이긴 하다) 하지만 민주당이 양극화를 시대정신으로 받드는 것은 너무나 어리석은 짓이다. 이같은 방어적 심리 내지 노동조합적 심리가 만든 프레임으로는 지식사회의 헤게모니를 쥘 수도 없고, 서민.중산층의 뜨거운 지지도 받을 수 없다. 생래적으로 획기적인 개혁 내지 이상을 추구하는 지식사회에서 압도적 다수의 지지를 얻지 못하는 세력은 진보라고 말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미국 민주당, 영국 노동당은 진보가 맞지만, 한국의 민주당, 민노당, 진보신당은 과연 진보라고 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양극화 해소라는 말이 들어갈 자리는 대체로 ‘빈곤 해소(개선)’이라는 말이 들어가면 된다. 영국 노동당, 독일 사민당, 미국 민주당이 1990년대 중 후반에 발표한 주요 강령적 선언에는 거의 예외 없이 빈곤(해소, 개선)이라는 말이 들어가 있지, 양극화 해소라는 말은 없다. 당연하다. 빈곤 해소 과목(?)은 학부모(유권자)가 관심도 상대적으로 많고, 학생(진보 정당)도 비교적 좋은 성적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격차 자체를 줄이겠다는 것이 아니라, 최하층의 소득을 일자리, 세금, 복지 정책 등을 통하여 끌어올리겠다는 것이니! 양극화라는 프레임은 버려야 마땅하다.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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