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토론 > 21C 진보정당방

|
![]() |
<제헌의회 속기록> 인민이냐, 국민이냐 |
![]() |
조회 (2103) | 추천 (0) |점수 (0) | 2009-06-06 10:47:11 신동진 |
![]() |
헌법.gif |
|
4. ‘인민’ 이나, ‘국민’ 이냐 요즘은 좀 달라졌지만, 예전에 저는 ‘인민’이라는 단어를 공개적으로 사용하는 것을 꺼려했습니다. 예상하시는 것처럼 제가 ‘붉은 물’이 들었다고 보여질까 저어되기 때문이지요. 그 연원이 어딜까? 많은 사람들은 그것이 명시적으로 드러난 것이 제헌의회 때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다음과 같은 글들이 그 근거로 사용되곤 합니다. (강조는 필자)
「헌법 초안에는 일괄적으로 ‘인민’ 이란 용어가 사용되었는데, 이를 두고도 논란이 벌어졌다. 윤치영은 “‘인민’이라는 말은 공산당의 용어인데 어째서 그런 말을 쓰려하는가. 그런 말을 쓰는 사람의 사상이 의심스럽다”고 주장했다. 이에 조봉암은 “‘인민’은 미국. 프랑스. 소련 등 세계 많은 나라에서 사용하는 보편적인 개념으로 단지 공산당이 쓰니까 기피하자는 것은 고루한 편견일 뿐이다”라고 반론을 폈다.」 (박영수, 「운명의 순간들:다큐멘터리 한국근현대사」(바다출판사, 1998 / 275~276쪽)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 1940년대편 2권 」 141쪽에서 재인용)
「제헌 헌법 초안에는 '국민'이 '인민'으로 표기되어 있었다. 그러나 국회 본회의 중 제헌의원들의 헌법 검토과정에서 "북조선인민위원회에서 '인민'이라는 말만 들어도 골치가 아프다"는 한 의원의 말에 압도적인 표로 '인민'이 '국민'으로 표기가 바뀌게 됐다」 (여의도 통신 2008.7.16 “제헌국회 / 40여 일만의 헌법 제정 그 숨겨진 이야기”)
제헌의회에서 이승만과 반공세력들이 조봉암 의원(훗날 이승만에 의해 죽임을 당한)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헌법 초안에 적혀있던 ‘인민’을 ‘국민’으로 표결로 바꿔버렸다 라는 이런 스토리. 그런데 이 스토리가 사실과 달랐습니다. 확인 들어갑니다.
1948년 6월23일 제헌의회에 보고된 헌법기초안. 이 초안에는 이미 ‘인민’이 아닌 ‘국민’이라고 기재돼 있습니다. 제1장 총강 제2조에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발한다.”라고 하고, 제2장의 제목도 “국민의 권리 의무”입니다.
그러니까 <헌법초안에 ‘인민’으로 돼있던 것을 제헌의회에서 ‘국민’으로 표결로 바꿨다>라는 말은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국민’으로 돼있던 초안이 제헌의회 과정에서 ‘인민’으로 바뀔 뻔 했습니다. 기존에 제가 갖고 있던, 그리고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는 정반대의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1948.7.1 제헌의회 제22차 회의에서 벌어진 일입니다. 헌법기초안 제2독회 중 「제2장 국민의 권리 의무」에 대해 진헌식 외 44명이 ‘국민’을 전부 ‘인민’으로 바꾸자는 수정안을 제출하고 토론이 벌어집니다. 진헌식 의원은 다음과 같은 배경설명을 했습니다. (진헌식 의원은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소속으로 당선되었으니 분류한다면 이승만계가 될 것입니다)
“‘국민’이라고 하면 국가의 구성문제로서 국가와 이해관계가 일치되는 면에서 보는 호칭같이 생각됩니다. 그러나 제2장에서는 국가라는 단체가 각 개인에 대하여 권리의무를 보장한다는, 말하자면 국가와 개인의 면에 입각해서 규정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제2장의 ‘국민’은 ‘인민’이라고 수정하면 적절하다고 하겠습니다. 중화민국헌법에도 다른 점에서는 전부 ‘국민’이라고 했지만 제2장 각조에 있어서는 전부 ‘인민’이라고 하였습니다” (380쪽)
최국현 의원(무소속 당선, 이후 반민특위 재판관으로 활동)은 외국인에게도 세금을 부과해야 하므로, ‘국민’이라고 하면 안되고 ‘인민’이라고 해야 한다며, 수정안을 찬성합니다.
일제강점기 공산주의자로서 항일언론인이었다가 해방 후 송진우 등과 민족주의 우파의 핵심역할을 했던 김준연 의원은 “각 조문에 있어서 인민으로 할까, 국민으로 할까 그것은 전문위원들이 심각 심심(甚深)히 고려해서 결정할 필요가 있다”라며 전문위원의 의견을 들을 것을 요청합니다.
이에 헌법기초안 작성의 주도적 역할을 했던 유진오 전문위원은 ‘인민’으로 고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냅니다.
그러자 ‘국민’을 사용하자는 반대의견들이 나오고, 경우에 따라서 ‘국민’과 ‘인민’을 사용하자는 의견도 나옵니다. 이때까지 논의의 핵심은 내외국인의 권리의무의 구분(교육받을 권리, 공무담임권, 납세,병역의 의무 등)을 고려해서 ‘국민’ 또는 ‘인민’을 써야하지 않겠느냐는 것이었지, 공산당이 쓰는 말이니까 쓰면 된다, 안된다는 식의 주장은 나오질 않았습니다.
이에 대해 <권승렬 안>을 제출해 헌법기초에 큰 역할을 했던 권승렬 전문위원이 논의를 정리하는 발언을 합니다.
“그러니까 ‘인민’이나 ‘국민’이나 다 헌법이 외국인에게 적용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다만 ‘인민’이라고 써도 우리 국민과 국가의 약속이니까 우리 국가의 구성원인 국민에 대한 약속이지 외국인과의 약속은 아니올시다 (중략) 그러니까 이것을 전적으로 ‘인민’으로 고치면 ‘인민’으로 고칠 것이고 ‘국민’으로 고치려면 모두 ‘국민’으로 고쳐야 옳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인민으로 쓰면 외국사람에게 적용이 되지마는 ’국민‘이라고 쓰면 외국사람에게는 적용이 안된다고 하는 그것은 아닙니다” (388-389쪽)
권승렬은 ‘국민’이라고 쓰면 외국인이 배제되고, ‘인민’이라고 써야 ‘외국인’까지도 포괄하는 법이 되지 않겠느냐는 의견에 대해서, 법리적으로 그렇지 않다 즉 ‘국민’이든,‘인민’이든 외국인을 포함하는 의미는 아니기 때문에, 외국인까지 포괄하기위해 ‘국민’을 ‘인민’으로 바꿀 이유는 없다고 주장을 한 것입니다.
바로 이 때, 즉 권승렬 전문위원의 발언에 바로 뒤이어 윤치영 의원이 그 문제의 발언을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 헌법을 제정하는 데에 있어서 외국사람의 관계를 이용해 가지고 ‘국민’이라는 것을 ‘인민’이라고 하는 것은 나는 절대로 반대합니다. 북조선인민위원회 운운만 하더라도 나는 지긋지긋하게 들립니다. 나는 ‘인민’이라고 쓰는 데에는 절대 반대합니다.”
자, 그럼 이 다음에 조봉암 의원이 반대발언을 했을까요? 아니요. 조봉암 의원은 ‘국민’, ‘인민’ 논쟁에서 발언조차 안했습니다. 윤치영 의원의 발언 뒤에 바로 당시 사회였던 신익희 부의장이 표결에 붙입니다. 법리적인 반대와 반공적인 반대주장에 이어 바로 벌어진 표결. 결과는 ‘인민’으로 고치자는 수정안이 재석 167명, 찬성 32명, 반대 87명으로 부결됐습니다. 수정안 제안자가 45명이었는데, 그 인원만큼의 찬성도 얻지 못했습니다. 곧 이어 ‘국민’을 사용한다는 원안에 대해서 다시 표결을 한 결과, 재석 167, 찬성 89, 반대 12로 ‘국민’이라는 표현이 선택됐습니다. 표결의 결과는 비록 찬성이 반대보다는 압도적으로 많았으나, 과반수 84표보다 각각 3표와 5표 넘는 수준의 찬성으로 가결됐습니다.
이런 사실들은 앞서 인용했던 글들과는 사실과 다른 점도 있고, 온도차도 있습니다. 즉 헌법초안에는 '인민'이 아니라 이미 ‘국민’으로 돼있었고, 제헌의회에서 '인민'을 '국민'으로 바꾼 것이 아니라 ‘국민’을 ‘인민’으로 바꾸고자 논의했으며, 윤치영vs조봉암의 논쟁도 없었고, 표결도 ‘압도적인 표’라는 표현은 과잉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또한 간과하지 말아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당시 제헌의회에는 <무소속 구락부>가 있었습니다. 이 <구락부>는 진보적 논의를 주도했던 조봉암 의원이 주도한 것으로서 반이승만, 반한민당 노선의 무소속 의원 72명이 참여했습니다. 그런데 이 그룹에서 조차도 '인민'을 주장하는 수정안을 내지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뭔가 이 부분에도 ‘신화’가 끼어들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좀 더 뒤져봤습니다. <여의도통신>의 글에는 인용출처가 없었고, 강준만이 재인용한 박영수의 글에도 출처가 역시 없었습니다.
여기서 잠시 헌법초안이 만들어진 과정을 살펴보겠습니다.
1948년 5월31일 제헌의회 개원 6월3일 헌법기초위원회 설치 (기초위원 30명, 전문위원10명) 헌법기초위원회의 헌법초안 독회 6월23일 헌법기초안 본회의 보고
그렇다면 헌법기초위원회가 헌법초안을 독회할 때, ‘인민’과 ‘국민’을 둘러싼 ‘윤치영vs조봉암’의 논쟁이 있었던 것일까요? 불행히도 그 속기록은 지금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윤치영은 헌법기초위원이 아니었으니 기초위원회에 참석해서 조봉암과 논쟁을 벌일 수는 없었습니다. 결국, 윤치영 對 조봉암 논쟁은 사실무근입니다. 그렇다면 조봉암이 어딘가에서 앞서 인용한 그런 말을 하긴 했던 것일까?
유진오는 1980년에 <헌법기초회고록>을 냈습니다. 그 회고록에서 앞서 인용한 윤치용 의원의 본회의 발언을 소개하며, ‘인민’이 ‘국민’으로 바뀐 것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아쉬움을 표했습니다.
“‘국민’은 국가의 구성원으로서의 인민을 의미하므로, 국가우월의 냄새를 풍기어, 국가라 할지라도 함부로 침범할 수 없는 자유와 권리의 주체로서의 사람을 표현하기에는 반드시 적절하지 못하다. 결국 우리는 좋은 단어 하나를 공산주의자에게 빼앗긴 셈이다” (유진오, 「헌법기초회고록」65쪽, 일조각 刊)
‘공산주의자에게 빼앗겼다’는 표현이 적절한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헌법기초위원회의 활동내용을 소개한 그 회고록에도 조봉암의 발언은 없었습니다. 더 이상의 ‘신화’ 추적은 그만두기로 했습니다. 그냥 새롭게 알아낸 사실을 근거로 해서 ‘국민’이 결정된 과정을 추적해보기로 했습니다. 제헌 당시 활용됐던 헌법초안들과 ‘국민’, ‘인민’의 사용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위 표에서 보면, <행정연구회안>과 <유진오안>의 1라운드에서 ‘인민’의 승리(?)입니다. 즉 <공동안>에서 '인민' 표현을 쓴 것입니다. 이것은 유진오의 영향이 절대적이었습니다. 다음 본선이라고 할 수 있는 제헌의회 헌법기초위원회에서의 <공동안>과 <권승렬안> 2라운드의 승자는? 앞서 말씀드렸듯이 본회의에 올라온 ‘국민’의 승리입니다. 법조계 쪽에서 나온 <권승렬안>은 어떤 안인가? 해방 후 당시 법조계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던 인물들은 김병로, 이인과 같은 항일법조인들이었습니다. 권승렬 또한 친일의 때를 묻히지 않은 법조인이고, 김병로와 같이 몽양 여운형 등 독립운동가의 변론을 했던 인물입니다. 그렇기에 <권승렬안>에는 <공동안>에 없는 ‘친일파에 대한 소급 처벌 규정’이 들어있습니다. “<권승렬안>은 친일파 처벌 규정을 마련하고, ‘대한민국’, ‘국무총리’, ‘국무회의’ 등 ‘역사적 정통성의 문제를 보다 깊이 고려했다”(이영록, <우리 헌법의 탄생(서해문집,2006)>라고 합니다. 이런 헌법안에서도 ’인민‘이 아닌 ’국민‘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던 것입니다. 즉 항일적이고,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정통성을 승계하려는 관점에서 만들어진 헌법에서도 ’인민 ‘이 아닌 ’국민‘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던 것입니다. 유진오는 일제의 ‘영원한 승리’를 설파했던 친일문인이요, 한일회담의 막후주역이자, 전두환의 쿠데타 후 국정자문위원으로 지내는 등 기회주의적인 권력지향인물로 평가받는 인물입니다. 그래서 제헌 당시 유진오가 ‘인민’이란 단어에 집착하고, 친일관료출신인 <행정연구회>가 유진오의 주장에 설득 당했다는 사실을 저는 그들에게는 ‘我’가 없는 전문성만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한민족이 이민족의 지배를 받든, 안 받든 그들은 잘 살아왔고, 잘 살아갈 수 있는 ‘영혼 없는’ 전문가 또는 기득권세력이었기에 코스모폴리탄적인 느낌이 드는 ‘인민’이라는 말을 더 선호했고, 그런 주장에 쉽게 설득당할 수 있었겠다하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독립운동을 해왔던, 그래서 ‘복국(復國)’을 하고 ‘건국(建國)’을 해야 했던 민족세력에 있어서의 ‘대한민국’과 ‘국민’은 친일파가 얘기하는 것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었고, 그래서 유진오도 주장을 굽히지 않을 수가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제헌헌법에 ‘인민’대신에 ‘국민’이라는 단어를 새겨 넣었던 세력은 흔히 여겨지듯, 친일반공독재세력만은 아니었고, 항일민족우파세력도 그 단어를 선호했던 것입니다. 김구를 중심으로 한 세력은 반탁, 반공의 입장이었고, 김규식 또한 공산주의에는 반대 입장이었으니 이상한 일은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세력들이 즉 김구, 김규식, 양심적인 민족세력 등이 - 나중에는 친일적인 세력까지도 - 후에 야당세력 또는 재야세력이 되었다는 점을 생각해본다면, 대한민국의 주요정치세력은 여든 야든, 다 ‘인민’보다는 ‘국민’을 선호했던 뿌리를 갖고 있다는 말이 됩니다. 야당이나 재야에 있다가 어느 날 집권세력으로 말을 갈아타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일관성을 강변하는 근저에는 바로 이런 뿌리가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대한민국에서 ‘한국적’,‘민족적’, ‘애국’이라는 말이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이유도 이런 뿌리와 깊은 연관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대한민국에서 ‘진보’ 특히 국적 없는, 소수를 지향하는 ‘진보’가 성공하기 힘든 이유도 바로 이런 뿌리에 그 근원이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경향신문 <새로운 공화국을 꿈꾸며(5) - 국가와 민족을 다시 생각한다>에서, 박명림 교수는 “제국주의에의 망국을 포함한 근대국가 형성과정은 더욱더 강한 국가 우위, 전체 우위 관념을 초래 했습니다. 그리고 건국 이후 인민들은 근대적 계층이나 계급, 시민이나 개인이 되기에 앞서 먼저 국민이 됨으로써 국가와 자신을 동일시하게 되었습니다. 남북의 생사를 건 투쟁이 국가와 국민의 동일시를 더욱 강화해왔고요.” 라고 했습니다. (강조 필자) 나라 없는 설움을 그 누구보다 더 많이 겪었을 인민들은 ‘대한민국 인민’으로서 ‘국민’이라는 말에 어떤 안도감을 느꼈을 수도 있었겠다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해방 이후 인민들이 일제강점기 시절보다 더 많은 학살과 참극을 겪은 경우가 있었다하더라도 일제강점기로 다시 돌아가거나, 또다시 외국의 속국으로 살겠다는 뜻은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김상봉 교수도 그러한 전통을 ‘국가지상주의’ 라고 말하면서 이 전통이 “식민통치와 전쟁의 경험으로부터 한국인의 의식 속에 깊이 각인되어 있는데, 제대로 된 나라를 위해서는 이 전체주의 도덕을 해체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라고 말하더군요. 그가 말하는 제대로 된 국가 는 “일관되게 개인의 자유와 자율성을 억압하는 모든 유사권력들로부터 개인을 지켜내는” 일을 하는 그런 국가 입니다. 결론은 이렇습니다. <‘인민’이냐 ‘국민’이냐>로 대한민국의 어떤 세력에게 ‘국가지상주의적 전통’의 책임을 묻는 것은 적절치 않아 보입니다. 하지만 ‘인민’이 아닌 ‘국민’을 사용한 원죄(?)는 친일, 반공, 독재, 기회주의세력에게 덮어씌워져 있었습니다. 그것도 글 모두에 인용한 글들처럼 뭔가 석연치 않게 사실과 다른 작문을 해댄 신화에 기댄 결론이었습니다. 이런 자세로는 ‘국가지상주의’의 문제도, 진정 '인민'을 위한 '제대로 된 국가'를 만들 대안도 찾아내지 못할 것 같습니다. 사족으로 두 가지 사실을 더 덧붙인다면 북한 즉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헌법(1948.9.8)에는 제1장 근본원칙에는 '인민'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였으나, 제2장은 '공민의 기본적 권리 및 의무'라고 돼있습니다. 즉 북한에서는 '공화국 인민'을 '공민'이라고 줄여 부른 것이지요. 아마도 남한 헌법에서 '국민'이라는 표현을 쓴 영향도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해방 공간에서 좌우합작과 남북통일을 위해 선도적 노력을 하다가 극우세력에게 피격을 당해 돌아가신 몽양 여운형 선생. 중도좌익으로 자리매김 되는 그 분도 <조선인민당>을 창당하고 당의 오륜(五倫)를 얘기하면서 '국민'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바로 '국민개병(國民皆兵)'과 '국민개로(國民皆勞)'입니다. -끝-
P.S - 이 글은 진작 작성해두었으나, '노무현 서거'로 글 올리는 것을 보류했다가 이번에 올린 것입니다. <제헌의회 속기록>연재는 몇 차례 더 글 올리는 것으로 계획을 말씀드렸었으나, 더 시급한 일이 있어 일단 보류하겠 습니다. 그동안 읽어주시고 관심보여주신 분들께 양해를 부탁드리면서 심심한 감사의 마음을 드립니다. |
|
|
|
댓글 4개
엮인글 쓰기
|
|
|
| 1 | 2 | 3 | 4 | 5 | 6 | 7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