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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정부의 실패에서 새로운 진보의 재구성을 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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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2876) | 추천 (0) |점수 (0) | 2009-04-22 11:38:07 김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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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정부의 실패에서 새로운 진보의 재구성을 본다 - 이남주 교수의 <잘못된 정치 전략과 지지기반의 와해>에 대한 논평
김 두 수(사회디자인연구소 상임이사)
1. 평가를 시작하며
노무현 정부를 평가함에 있어, 특히 정치영역의 평가는 간단하지 않다. 집권 5년 동안 전체적인 흐름을 관찰하면서 각각의 시기에 다르게 수립된 정책을 제대로 평가하기란 무척 어려운 일이다. 집권세력 내부에서 일관된 정치 전략을 공유한 사람이라면 성공과 실패, 그리고 한계를 잘 정리할 수 있겠지만, 부분 부분에 걸쳐서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활동가의 입장에서는 결과적인 평가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결과적인 평가는 자의적 주관성을 반영하게 되지만, 한편으로 냉정하게 결과물을 가지고 평가한다는 현실성은 있다. 노무현 정부에 대한 평가가 제대로 나오지 않은 상황에서 이남주 성공회대 교수의 노무현 정치에 대한 평가는 소중한 자산이다. 노무현정부가 물러난 지, 1년이 넘어가지만, 주목할 만한 평가가 없는 실정에서 ‘한반도사회경제연구회’의 시도는 무척 고무적인 일이다. 노무현정부에 대한 평가를 학계에서 진행되는 평가에 의존할 것이 아니라, 정치현장에 함께했던 많은 활동가들이 앞장서 해야 할 일이다. 특히 새로운 정치를 꿈꾸는 사람과 집단이라면 노무현정부에 대한 엄정한 평가는 정치활동 최우선의 선결 과제다.
노무현정부의 정책을 관찰해 보면, 크게 3기의 흐름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기는 집권 초기에서 2004년까지의 기간으로 대통령 선거에서 주장했던 관성에 따른 흐름이 있었다. 2기는 2005년에서 2006년까지 기간으로 기존의 흐름과는 다른 새로운 시도와 모색과정이 있었고, 3기는 2007년에서 퇴임까지 기간으로 정치현실에서 충돌과 순응과정이 있었다. 이러한 정치적인 흐름에는 어떤 전략적 근거에 따라서 이동, 변동해 왔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구체적인 정치 전략이 존재했는지 아니면, 없었는지 판단하기 어려운 문제이지만, 노무현 대통령의 정치적 선택이라는 측면에서 큰 흐름에서 살펴보면, 이해를 할 수 있을 것이다.
2. 시대정신과 정치 전략과의 관계는?
이남주 교수는 “노무현정부가 정통 민주야당을 주체로 한 김대중 정부의 계승인 동시에 한국정치의 새로운 전환점으로 기대를 받고 출범했는데, 초반에는 그 기대가 현실화하는 듯 보였으나 결국은 철저하게 무너졌다”고 총평을 했다. 이남주 교수는 2007년 대통령 선거와 2008년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참패를 근거로 정책적 측면에서 평가는 여러 가지가 될 수 있겠지만, 정치적인 면에서 실패했다는 점에 큰 이견이 없다고 했다. 그래서 5년간 정치적 실패의 원인들에 대한 평가가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남주 교수의 대략적인 총평에 동의하는 편임에도 불구하고, 정권재창출의 실패와 득표율의 비교에서 결론을 설명하기보다는 진보개혁세력의 분화와 정치적 기반의 와해가 정치적 실패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무엇보다도 노무현 정부에 대한 평가는 2002년 시대정신의 승리라고 환호했던 기세가 2007년 대참패로 귀결된 원인을 찾아내야 한다.
이남주 교수는 “노무현 대통령의 지지율 급락에 대해 정책적 잘못을 지적하는 경우가 많은데, 사실은 정치적 요인을 찾아야 한다”고 했다. 이남주 교수는 “지지율의 급락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 정치적 요인을 찾을 필요”성을 강조하는데, 정대화 교수가 주장한 노무현 정부의 권력구조상의 지역연합이나 정치사회적 연합의 구속력이 없는 ‘순수권력’이라는 지적과 최장집 교수의 반(反)정치적 형태가 정당정치와 민주주의를 약화시킨 주요원인이라는 지적을 배척하고 “노무현 정부도 자신의 정책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정치연합의 구상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고, 또한 어떤 정치연합을 추구하는가는 다시 정책의제의 선택에도 영향을 주었다. 따라서 정책적 목표와 정치 전략이 어떻게 상호작용을 했는지를 분석해야 노무현 정부의 정치실패의 원인을 종합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고 했다. 과연 지지율의 급락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 정치적 요인이 ‘정치 전략’의 오류에서 비롯된 것인가? 특히 지지율의 급락은 노무현 정부의 실패를 단적으로 보여준다는 견해도 있지만, 노무현 정부의 지지 기반의 취약함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대통령의 지지도가 형편없이 추락하는 것이 꼭 한국적 상황만은 아니라고는 하지만, 노무현 정부의 지지도 등락은 변화무쌍했다. 노무현 대통령 당선 당시 48%의 득표를 기록했지만, 지지자의 구성을 정확하게 분석할 필요가 있다. 노무현 정부와 열린우리당의 전략적 기조에서 지지율에 대한 착각이 있었다. 최종적으로는 노무현 단독으로 정권을 잡았지만, 노무현과 정몽준의 단일화 효과로 쟁취했다는 사실이다. 노무현 지지자 25~30%와 정몽준 지지자 25% 전후의 결합으로 정권 장악했다. 노무현의 25% 지지자는 전통적 지지자로 호남지역과 호남 출신 그리고 수도권 개혁세력이었고, 정몽준의 25%는 단순하지 않았다. 2002년 월드컵 경험으로 기존 관습을 싫어하는 쿨한 세대와 민족적 자부심을 중시하는 애국주의의 영향, 월급쟁이 소시민으로 구성되는 중산층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따라서 노무현의 정부의 지지기반은 원천적으로 취약한 상태였다. 따라서 정치 전략의 잘못에서 지지율 급락의 원인을 찾고, 실패의 원인 분석하면, 뭔가 큰 흐름을 놓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시대적 과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문제들을 전략의 실패로 모두 연결하면 처음부터 목적성을 가지고 집행하는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사실은 그 반대일 가능성이 아주 높다. 의식적인 기획에 의한 정책을 집행했다고 하기 보다는 상황에 수동적으로 대응하는 차원에서 집행되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3. 과연 트라이앵귤레이션 전략은 있었는가?
이남주 교수는 노무현정부가 초기 진보개혁세력의 적극적인 동원을 중심으로 한 전략에서 미국의 클린턴 행정부 시기의 트라이앵귤레이션(triangulation, 삼각측량)과 유사한 것으로 전환했다고 하면서, 그 증거의 하나로 노무현 대통령은 2007년 2월경, ‘유연한 진보’의 필요성을 역설했고, 개방문제, 평택기지건설 사례를 통해 기존 진보개혁노선의 계승이 아니라 이를 넘어설 수 있는 새로운 비전의 필요성을 강조한, 이것을 ‘트라이앵큘레이션 전락’과 같은 맥락으로 파악하고 있다. 이남주 교수의 지적에서도 발견되듯이 노무현 정부는 각종 정책에서 진보개혁세력과는 2003~4년경에 균열이 발생하고, 2년여 기간을 경과하고 2007년 2월경에 논쟁적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하지만, 상당한 시간차가 존재한다. 노무현 대통령은 이러한 2년의 과정에서 과연 ‘트라이앵귤레이션 전략’으로 정치 전략을 전개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먼저, 이남주 교수는 ‘트라이앵귤레이션 전략’을 미국의 클린턴 대통령의 정치참모였던 딕 모리스에 의해 만들어진 전략으로 민주당과 공화당의 정책에서 좋은 것을 선택하여 결합하는 정책패키지를 만들어 정치적 지지기반을 확대하는 정치 전략으로 규정했다. ‘트라이앵귤레이션 전략’에 대해 정확하게 지적했다고 본다. 그런데 이남주 교수는 “트라이앵귤레이션 전략은 단순히 정치 공학적 전략만은 아니고 미국의 뉴(new)민주당 노선이나 영국의 제3의길 노선 등 기존의 진보이념을 지구화하려는 환경 속에서 재구성하려는 시도와 연결된 정치전략”이라고 확대하여 규정했는데, 많은 부분에서 동의하기 어렵다. 미국의 경우, 클린턴이 집권하는 과정에서 민주지도자회의(DLC)가 큰 역할을 했는데, DLC는 트라이앵글레이션 전략이 나오기 10년 전부터 활동하면서, 민주당의 전략적 방향을 개혁하려고 노력해 온 조직이다. 트라이앵귤레이션 전략은 클린턴 집권 2기 선거를 위한 정치 전략이었기 때문에 뉴민주당 노선으로 곧바로 연결하는 것은 무리한 유추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영국의 경우에도, 블레어의 집권에 클린턴의 선거 전략이 많은 영향을 준 것은 사실이지만, 영국 노동당의 혁신 노력은 블레어 이전에 노동당 당수들도 역사적 전환을 위해 많은 시도를 진행해 오던 상황이었다. 따라서 정당의 이념과 노선의 혁신, 즉 진보정당의 혁신을 모두 트라이앵귤레이션 전략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역사적으로도 정확한 개념 규정이 아니다. 하지만 ‘트라이앵귤레이션 전략’이든, 아니면 노무현 방식의 어떤 정치 전략이든 결국 노무현 대통령과 정부는 집권 초기와는 다르게 대전환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위에서 대전환의 근거를 시대정신의 전환에서 찾았다. 시대정신의 전환의 근거를 상황적 요소에서 찾았지만 그 외에 주체적 문제는 없었는가를 살펴보자. 이남주 교수는 진보개혁세력의 내부의 균열에서 원인을 찾고 있다. 2003년 6월 철도파업, 그 후 이라크 파병 문제로 노동운동진영, 시민사회와 균열이 심화되면서 노무현정부와 진보개혁진영과의 관계가 새롭게 진행되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노무현 정부는 정책집행과정에서 충돌을 계기로 점차 기존 진보개혁노선의 계승이 아니라 이를 넘어설 수 있는 새로운 비전의 필요성을 더욱 강조하기 시작했고, 이러한 문제의식 자체는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유연한 진보로 지칭하든 아니든 새로운 진보이념의 구성을 위한 노력 자체를 노무현 정부의 정치적 실패의 원인으로 지적할 수는 없다고 했다. 문제는 이러한 새로운 비전을 발전시키고 구현할 수 있는 정치 전략이 부재했거나 잘못됐던 점에 있었다고 정리했다.
이남주 교수가 지적하는 정치 전략의 부재(不在)와 잘못은 병립하기 힘든 주장이다. 사실은 정치 전략이 없었거나 정치 전략이 잘못되었거나 둘 중에 하나일 것이다. 이남주 교수는 ‘트라이앵귤레션 전략’이라고 지적한 것으로 보아서 정치 전략의 부재보다는 잘못된 전략이라는데 초점이 있는 것 같다. 노무현정부의 트라이앵귤레이션은 가장 부정적인 결과, 즉 새로운 지지기반이 형성되지 않은 채, 기존의 지지기반마저 붕괴되는 결과가 출현했기 때문에 정치적 실패라고 했다. 더욱 큰 문제는 트라이앵귤레이션 전략의 방향설정이 잘못된 것이라고 했다. 자신의 지지 세력이 될 수 없는 상대를 염두에 둔 의제를 반복적으로 제기하며 사회적 합의가 형성돼가는 의제가 아니라 논쟁적, 갈등적 의제를 반복적으로 제기하여 지지 세력의 동원에도 성과가 없었고, 결국 지지기반의 균열만 초래했다. 이남주 교수는 그 대표적 사례가 당정분리, 대연정, 한미FTA의 추진이라고 했다.
다시 한 번 문제의식으로 돌아가 보면, 과연 노무현 대통령은 ‘트라이앵귤레이션 전략’을 사용하였는가하는 점이다. 앞에서 정리해 보았듯이 노무현 대통령도 다른 그 누구도 시대정신의 대전환을 알지 못했다. 만약 대전환을 알았다면 훨씬 주도적으로 대혁신을 주창하고 적극적인 정치 전략을 공세적으로 전개했을 것이다. 영국의 노동당이 ‘뉴노동당’을 걸고 나왔듯이 열린우리당의 제2기, 재창당에 준하는 노력을 선언했을 것이다. 시대적 과제가 변하고 전환되고 있는데도 진보개혁진영은 노무현 정부 5년이 다 가도록 조직적으로 혁신을 모색하지 못했다. 클린턴 정부시기에 구사한 ‘트라이앵귤레션’은 정치적, 정책적 쟁점이 발생하는 작은 사안마다 재빠르게 대응하는 전술적 대응을 주요한 특징으로 한다. 그런데 노무현 정부는 발생하는 사안마다 사회적 갈등이 첨예한 큰 사안들과 맞서야 했다. 최소한의 협상의 여지가 있어야 ‘삼각측량 전략’이 먹히는데, 그러한 여유마저 없었다.
이남주 교수는 정치 전략의 방향설정이 잘못되었다고 하면서 지지기반 이외의 세력과의 관계보다는 지지기반에게 더욱 초점을 맞추는 정책들과 정치 전략이 필요했다고 했다. 유연한 진보를 뒷받침하기 위해서도 지지세력 내에서의 동원에 일차적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는 지적이다. 대부분의 정치학자나 전문가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정치 상식에 가까운 것을 하지 않았을까? 왜 노무현 대통령은 지지 세력에게 주목하지 않았을까? 상당히 복합적 요소가 결합되어 있을 것이다.
첫째로, 주체세력의 분화가 불가피하다는 잠재의식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노무현 대통령의 당선도 투표 전날에 정몽준의 지지철회를 뚫고 단일정치세력에 의해 집권한 것처럼, 정치적 착각이 일어나기 좋은 정치 상황이었다. 그리고 열린우리당의 창당을 통해 의회권력을 재편하면서 선거연합정당이라는 성격보다는 민주화 과제를 성취할 개혁지향의 정당으로 설정한 것처럼 착각이 일어났다. 언론에 의해 설정된 개념이지만, ‘뺄셈의 정치’를 통해 노무현의 정치적 결단은 계속 성공을 해왔다. 선명한 노선으로 선도하면 승리할 수 있다는 성공의 경험은 노무현 집권 5년 동안 믿음처럼 퍼져있었다. 조직적 협력이나 집단적 모색보다는 올바른 목표를 선취하는 것을 정치적 방법으로 선호한 것이다. 또한 열린우리당의 창당과정에서도 개혁적 인사들은 공개적으로 열린우리당은 분화발전할 과정에 있다고 공언했다. 당시에는 상식처럼 인식되었다.
둘째로, 집권자의 입장에서 판단이다. 통칭 진보개혁세력이라고 불리는 세력의 집권능력을 불신한 것으로 본다. 집권 초기, 인수위원회와 청와대를 구성한 상당수의 사람들은 진보세력을 대신해서 실무책임자에 임명되었다. 초기 노무현 정부의 구성에 ‘진보개혁세력’이라고 할 수 있는 활동가와 전문가가 많이 합류한 것은 사실이다. 초기의 사회경제적 측면에서 네덜란드 모델이나 북구형 모델에 대한 모색이나 이정우 실장의 존재는 진보적으로 중심축이 형성되었음을 이야기한다고 할 수 있다. 지금의 시점에서 평가를 살펴보면, 진보개혁세력의 전문가들이 청와대 비서조직과 각종 위원회 등에 배치되었지만, 후반기로 갈수록 주도권이 관료들 쪽으로 넘어갔다는 것이 공통된 분석이다. 노동의 경우에 보면, 민주노총과 관계가 적대적이지 않았고, 교육의 경우도 전교조와 우호적이었다. 하지만, 화물연대 파업이나 철도파업, 그리고 전교조의 네이스 투쟁과 7차 교육과정 반대투쟁에서 보여준 좌파진보와 노선적 차이를 실감했을 것이다. 따라서 노무현 대통령은 정권을 운용하면서 집권세력이 단일한 조직적 실체가 아니라는 것을 절감하게 되었다. 그래서 2005-6사이에 진행된 정치적 선택은 이미 현실화 되어 있는 진보개혁세력의 차이를 자연스럽게 인정한 것이다. 진보개혁세력이 집권세력으로는 온건한 사민주의자와 개혁적 자유주의자들의 연합으로 구성되어야 하는데, 양극단의 이념적 분포가 존재하였다. 강경한 사민주의자 그룹의 정책은 무책임하고 현실성이 떨어진다. 개혁적 자유주의자 그룹은 존재가 미약했다. 결국 한 나라를 통치하는 집권자로서 현실적 선택은 정치세력과는 무관한 관료집단에게 의존하게 되었고, 정치적으로는 실패라는 비극으로 발전해 갔다.
셋째로, 청와대 정무능력의 한계다. 청와대는 정치력과 정무처리능력, 대외관계망을 확보하여 문제를 해결할 능력 중심으로 구성해야 한다. 청와대의 구성 자체가 전략적 정무적 능력 중심으로 구성되지 않았다. 청와대의 기능이 무엇인지 여러 가지 판단을 내릴 수 있지만, 기본적인 인맥 구축도 안 되는 사람들이 수석을 하는 경우도 많았다. 문재인 민정수석, 비서실장을 보면, 정치적 능력보다도 도덕적 기준을 우선했다는 생각이 든다. 집권 초기 검찰 등 권력기관을 개혁해야 할 중차대한 임무가 있는 민정수석을 정치적 경험이 없는 사람으로 임명한 것은 노무현 대통령의 인사철학과 스타일을 증명하는 것이다. 결국 청와대는 강력한 집행체제를 갖추지 않았고, 권력기관을 국민들에 의한 제도적 통제장치를 만드는 것보다 권력 스스로 불개입을 선언하는 조용한 방식으로 진행했다. 집권 초기의 비서진은 우리사회의 전반적 인적 구성의 평균 나이보다 젊었고, 정무 경험이 부족하고, 전국적 사업을 처리하기에는 부적절한 비서진이었다. 후반기로 가면서 비서실의 역할이 정무활동보다는 대통령 보고서를 쓰는 일이 주 업무가 되어버렸다. 따라서 청와대 비서실은 정치적 흐름과 정무적 판단에 따른 전략적 이동을 조직적으로 모색할 능력이 없었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노무현 정부의 정치 전략이 ‘트라이앵귤레이션’이라고 하기보다는 전략다운 전략이 없는 가운데 미래과제 선점 전략으로 전환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집권 초반기의 정치적 의제를 ‘민주화 성취의 완성’이라는 과거적 과제였다면, 후반기의 정치적 의제로 ‘비전2030’처럼 미래적 과제에 승부를 걸었던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2003년 검찰에 의한 정치자금 수사가 논란이 되자, “새시대의 첫차가 되고 싶었는데, 지금보니 구시대의 막차더라”는 이야기를 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정말 새시대를 여는 대통령을 갈망한 것 같다. 끊임없이 미래적 쟁점에 도전하고, 문제를 던지는 스타일로 이동해 갔다. 과거의 세력관계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정치 쟁점을 형성하다 보니 정치적 반대세력은 방관하고, 적극적 지지세력은 오히려 실망해서 지지를 철회하는 현상이 일상화되었다.
노무현 정부는 확고한 지역적 기반을 가지는 충성스런 지지기반이 없었다. 지지 세력이 혼재된 상태이다 보니 1차적 중심을 두는 전략을 구사할 필요를 덜 느꼈을 것이다. 소위 ‘전통적 지지기반’이라고 호남 중심의 지역주의는 노무현에게는 뛰어넘어야 할 과제였다. 집권의 과정에서도 독자적인 지역적 기반 하에서 집권한 것이 아니라 순수권력에 가까웠다는 정대화 교수의 지적은 그래서 정확하다. 이남주 교수는 노무현 정부가 방향전환을 위해 ‘트라이앵귤레이션’이라는 전략을 가지고 우(右)회전을 했다고 판단하지만, 정책의 집행과정을 살펴보면, 과거사 진상규명 위원회 설치와 4.3 사건에 대한 국가 사과, 노사정 위원회 설치, 투명사회실천협의회 구성, 복지정책의 확대 추진, 종부세 도입과 강력한 부동산 정책의 시행 등을 종합해 보면, 우(右)회전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 많다. ‘위원회 정부’ ‘로드맵 정책’이라는 비아냥거림을 들었지만, 노무현 대통령은 미래과제에서 정책의 선점과 성과를 통해 정권재창출이 가능하다고 판단한 것 같다. 우리가 직시할 것은 집권 5년차가 되어서 노무현 대통령이 새로운 진보의 모색이 필요하다는 문제의식을 제시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노무현 정부 평가에서 이점에 주목하는 평가를 보기가 쉽지 않다.
4. 당정분리 - 승자의 혼미(昏迷)
이남주 교수가 소제목으로 뽑은 ‘당정분리 - 잘못된 정치개혁의 목표’는 참 재미있는 제목이다. 2002년 대통령 당선 이후, 누구도 당정분리의 당위성에 문제를 제기한 사람이 없었고, 당정간의 운영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왜냐면, 당정분리는 노무현 대통령 시절에 제기된 것이 아니라, 새천년민주당 시절 2001년 쇄신파동을 겪으면서 정치개혁의 과제로 등장한 것이다. 그때까지 당 총재가 4대 권한(공천권, 임명권, 운영권, 재정권)을 독점하면서 집권당 대표를 지명하고, 국회의원 공천을 좌우하는 것을 방지하자는 차원의 구상이었다. 따라서 당정분리는 한국정당 역사에서 개혁해야 할 일차적 정치개혁의 과제로 만장일치로 동의가 된 사안이다. 자연스럽게 당헌에 반영되었다. 제왕적 총재제도의 청산과 함께 새로운 당 운영의 시스템을 마련하는 차원에서 정리된 것이다. 새로운 한국적 정당체제와 문화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문제로 ‘운영의 묘’를 살리면 되는 사안으로 판단했다.
당정분리의 문제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2004년 총선 직후다. 2004년 총선에서 승리하고 난 직후에, 진행된 김혁규 총리 지명파동과 아파트 분양원가 공개논란, 그리고 재보궐선거의 참패로 비롯되기 시작했다. 다수당으로 출범한 첫 개원 국회에서 한나라당 출신의 선거법 위반 국회의원 체포동의안이 부결되면서 다수당으로써 체면이 여지없이 구겨졌고 열린우리당의 국회의원들의 개혁적 성향이 의심을 받았다. 또한 당의장의 잦은 교체와 함께 책임성의 결여를 동반한 리더십의 부재가 왔다. 4대 개혁입법을 둘러싼 대 국회전략에서 무기력증을 드러내면서 서서히 침몰해 가기 시작했다. 152석이라는 과반을 넘는 의석수를 가지게 되면서 선거연합당으로 한계에 주목하지 않고, 권력의 크기를 중심으로 실용과 개혁으로 논쟁이 번졌다. 실용과 개혁논쟁은 분명히 언론이 던진 프레임에 말려들었던 측면이 있다. 때마침 재보궐선거에서 집권당에 대한 견제의식과 낮은 투표율, 지역적 불리함 때문에 패배하고 말았다. 선거의 패배는 노무현 정부에 대한 지지율 하락을 동반하고, 당과 청은 갈등하는 악순환 구조로 발전하였다. 집권 후반기는 이러한 순환구조가 대통령과 차기 출마자와 차별화의 늪으로 빠지는 시스템으로 발전하였다.
당정분리에서 나타난 갈등은 정치체제는 대통령 체제를 중심으로 운영되고, 정당체제는 내각제 방식으로 운영되는 한국적 정당체제에서 제왕적 총재체제를 혁파하면서 발생한 문제다. 미국과 달리 한국은 중앙당에 강력한 당대표가 존재한다. 선거과정에 대통령은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하고 일체의 선거 유세나 정치적 지원이 포함된 발언이 금지된다. 당은 당대표와 원내대표의 이원구조로 구성되어 있다. 집권당의 경우, 대통령을 포함하면, 하늘에 3개의 태양이 존재하는 구조다. 애초부터 철저하게 당정분리를 시행하려고 했다면, 청와대는 정무기능을 대폭 강화해야 했다. 그런데, 청와대는 그나마 존재하는 정무수석비서관 직책을 폐지하고, 정무기능을 오히려 반대로 축소했다. 게다가 무임소의 정무장관 제도도 없는 가운데, 개혁입법의 과제가 산적한 상태에서 대(對)국회의 역할과 기능은 더욱 크게 요구되고 있었다. 대통령 제도에서 정무기능의 강화는 당연한 것이었다. 그런데 정무기능이 오히려 폐지하다시피 약해졌으니 결과는 너무나 당연했다. 미국의 경우 백악관 1500명의 근무자 중에서 국회를 담당하는 정무 역할의 인원이 절반을 차지하는데 반해 청와대는 450명의 근무자 중에서 정무를 담당하는 인원이 20명이 되지 않았으니 어쩌면 정치적 곤경은 당연한 것이었다.
이남주 교수가 지적하는 것처럼 “새로운 당청관계를 만들어가는 데 ‘분리’적 측면이 아니라 ‘협력’적 측면에서 좀 더 진지한 고민”이 진행됐어야 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당정분리’라는 원칙을 통해 당에 간섭하지 않을 것이니, 대통령의 권한에도 간섭하지 말라는 방식으로 운영하였다. 대통령이 ‘분리’에 집착한 것은 “열린우리당의 역량에 대해 노무현 중심의 집권세력이 지녔던 부정적 태도가 더 큰 원인”이라 판단에 대해 고찰해 보자. 이남주 교수가 지적하는 문제는 노무현 대통령의 속마음을 모르면 알 수 없는 사안이다. 개혁당세력이나 노사모 등을 장기적으로 정당문화를 변화시킬 수 있는 동력으로 보고 이들과 동지적 관계를 더욱 중요한 정치적 자산으로 보았다는 것인데, 일리 있는 지적이긴 한데 증명할 길이 없다. 노무현 대통령은 개혁과제를 열린우리당과의 협력적 관계로 문제를 풀어가기 보다는 위원회를 통해 독립적으로 추진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열린우리당 내에 존재하는 개혁파에 특별한 애정을 보이거나, 전략적 연대가 가시적으로 보인 적이 없다. 특히 2004년 8월 이후 당내에서 큰 논쟁으로 충돌이 일어났던 ‘기간당원제’에 대해 개혁파에 대해 우호적 신호를 준 적이 없다. 따라서 노무현 대통령이 열린우리당에 대해 부정적 태도를 취했다는 것은 대체로 동의가 되지만, 개혁당세력이나 노사모를 중심으로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설정하여 정당을 변화시켜보려고 했다는 것은 사실적 증거가 별로 없다. 이것 역시 청와대의 정무기능의 상실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청와대가 ‘기간당원제도’로 왜 개혁파와 당권파가 싸우고 있는지도 잘 몰랐다는 것이 최근의 증언이다.
5. 노무현 대통령은 ‘대연정’제안으로 무엇을 얻고자 했을까?
이남주 교수는 “2005년 7월에 제시한 ‘대연정구상’은 논리적으로 합리적 요소가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실현가능성, 정치적 효과, 그리고 다른 의제와의 상대적 중요성 등에 문제가 있다. 노무현 정부의 임기가 반환점을 넘어서는 시점에서 양극화 등의 사회경제적 이슈가 다른 이슈를 압도하는 상황에서 지역주의 청산이라는 목표와 방법론에 대한 내부적 의견수렴이 부재한 상황에서 대연정을 제안한 것은 개인적 혹은 특정 정치세력의 생명연장을 위한 선택으로 받아졌다. 대연정보다는 자신의 정책을 뒷받침할 수 있는 지지 세력의 정비가 더욱 시급한 과제였다고 할 수 있다. 민노당 등 진보 개혁적 정치세력과 연대를 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이 더욱 필요했다”고 했다.
노무현 대통령이 제안한 ‘대연정’은 노무현 식(式) 승부사 정치의 표본이다. 대연정은 ‘노사정’ 사회적 대타협처럼 정치권의 대타협을 통해 합의될 수 정치적 사안이다. 그만큼 관철하려고 한다면, 상당한 기간이 걸리더라도 꾸준하고, 치밀하게, 세세하게 타협으로 풀어야할 것이다. 대연정을 성사시키려면, 전략단위를 구성하고 단계별 실행계획을 수립하여 주객관적 조건을 개선시켜야 하며, 추진의 과정에서도 공식적, 비공식적 논의구조를 만들고, 모든 논의창구를 가동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대연정’ 제안은 한차례 바람이 훑고 지나가는 일회성 제안에 머물고 말았다. 박근혜 당대표와 담판으로 관철하겠다는 것은 순진한 발상을 넘어 우둔한 생각에 가깝다. 또한 ‘대연정’의 명분으로 제안한 것이 시대 착오다. 현 단계에서 대연정을 제안할 수밖에 없는 근거가 ‘지역주의 청산’이라면 초점이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것이다. 사실 총체적 난국의 형성으로 새로운 시대적 과제로 떠오르고 있는 양극화문제와 새로운 경제발전의 모델을 창출하기 위한 정치권의 대타협의 일환으로 제안되었다고 선전하고 또 선전해도 될까 말까한 일을 정치적 과제를 중심으로 제안하니 야당의 정치선동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또 한번 민생을 외면하고 정치에 승부를 거는 정략꾼이 되어버렸다.
당시 언론을 포함한 정치세력들은 연정의 의미를 당을 통합하는 수준으로 격상시켜서 사고했다. 내각제의 역사가 없고 대통령 중심제인 우리 정치에 대연정의 의미가 제대로 해석될 수가 없었다. 한국의 정치문화는 대결주의가 기초를 이루고 있다. 대화와 타협을 해본 적이 거의 없다. 이런 가운데 갑작스럽게 공개적으로 제안해 버리니 애초부터 진지한 사고나 접근이 불가능했다. 모두 정치적 이익을 먼저 타산하는 정략적 사고를 기본으로 했다. 특히 박근혜는 여야회담이나 협상이 아니라, 국민 앞에서 선명성 경쟁을 펼치는 투사였을 뿐이었다. 투사와는 정치적 협상이 안된다.
대통령 임기 단축이라는 희생적 결단을 전제하기 했지만, 선거법 개정을 위한 대연정은 언론의 장난으로 결국 협소한 의제로 전락하고 말았다. 국민들의 인식도 지역주의가 급속하게 완화되고 있다고 느끼고 있었던 시점이었다. 노무현의 당선, 그리고 2004년 총선에서 약간씩 개선되고 있는 지역별 당선 현황과 각 당은 우위에 있는 지역에 공천할 때, 개혁적 공천을 시도함으로써 지역 독점적 폐해를 덜 느끼고 있었다. 반면에 열린우리당을 지지 기반으로 하는 호남권은 격렬히 반발했다. 호남을 기반으로 하는 정치세력들은 지역주의 극복을 명분으로 영남세력과 손을 잡는다는 식으로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었고, 집권 초기에 대북특검의 수용한 이후에 마음 한구석에 자리잡았던 의심의 증거가 현실화 된 것이다. 한나라당은 철저하게 정치적 이익을 위해 ‘대연정’제안을 정략으로 몰아갔고, 열린우리당은 전략도 없이 우왕좌왕하면서 반발심만 키워나갔다. 어차피 ‘대연정’ 제안은 정치적 지지 세력이나 반대세력 내부에서 각각 찬성과 반대가 나올 수밖에 없는 민감한 사안이므로, 단기 승부의 사안이 아니었다. 장기적 전략적 의제로 만들고, 정치적 명분을 획득하는 과정을 통해 정략적 세력이 누구인지를 부각시키는 전략이다. 대연정 제안이 완전한 패착(?)이 된 것은 7월에 제안하고 영수회담 한번으로 9월에 철회해 버렸다는 점이다. 2달 만에 없었던 일이 되어버렸다. 당내 소수파들은 대통령을 돕기 위해 ‘대연정’을 찬성하고 장기적인 운동으로 진행하기 위해 ‘특별기구’를 설치하기까지 하는데, 정작 제안을 했던 대통령이 없던 일로 만들어 버리면서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기”가 되어 버렸다. 한국 정치의 근본적인 문제점을 가시화하는 계기로 발전하지 못하고 일회성 이벤트로 전락하면서 대연정 제안은 진짜로 패착이 되어 버렸다. 대연정 논란으로 지지 세력은 호남과 비호남이 갈리고, 친노와 반노가 극단적으로 나누어지는 현상이 촉발되었을 뿐이다.
이남주 교수는 민노당 등 진보 개혁적 정치세력과 ‘소연정’을 추구하는 것이 필요했다고 지적하지만, 민노당의 성격과 전략적 입장을 간과한 견해다. 당시 민노당은 열린우리당과의 차별화가 제일의 과제였고, 열린우리당이 망하면, 진짜 진보세력인 민노당이 부흥의 계기를 마련할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다. 이른바 진보-보수의 구도에 따라 민노당과 한나라당 구도로 재편된다는 장기적 판단에 따라 ‘주요타격방향’(주타방)이라는 전략에 따라 한나라당과는 야당공조를 해도 열린우리당과 하는 개혁공조에는 오히려 소극적이었다. 이남주 교수가 “노무현 정부는 정치적 위기에서 지지 세력의 동원보다는 상황을 일거에 반전시킬 수 있는 대연정 같은 ‘빅아이디어’에 집착”했다고 한 지적은 일리 있는 지적이다. 정치적 결단을 통해 계속 성공해온 ‘결단의 승부사’들에게서 나타나는 ‘성공 신화의 전형적인 오류’이다. ‘대연정’은 일회적 제안이 될 수 없는 사안인데도 불구하고 단 한차례 정치협상으로 종결된 것은 ‘빅아이디어’에 의한 정치적 전술로 밖에 해석되지 않는다. 이것은 정치적 전략의 부재와 청와대 비서실이 대통령의 결단을 보조하는 참모기능으로 전락해 버릴 때 더욱 증폭된다. 특히 노무현 대통령의 ‘대연정’제안을 정치적 과제로 인식하고 활발한 정치활동의 계기로 삼은 개혁적 정치세력은 ‘묻지마 친노세력’에 불과하다는 오명을 뒤집어쓰고 정치적 진로를 모색하기 어려운 처지에 빠져버리고 말았다.
6. 한미FTA 논쟁이 남긴 것은 무엇인가?
이남주 교수는 “2006년 2월 미국과 한미FTA협상을 추진하는 것이 ‘빅아이디어’로 승부하는 대표적 예”라고 하면서 “한미FTA는 지지기반 내에 이념과 노선의 균열을 표면화”시켰다고 지적하고 있다. 한미FTA 추진은 진보개혁세력 내부에 이념과 노선의 차이와 균열을 가져온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여러 측면에서 논쟁적 사안이었다. 앞에서 노무현 정부의 정책흐름을 3기로 나누었는데, 2기는 2005년에서 2006말까지 기간으로 말한다. ‘한미FTA’는 2기의 핵심이었다. 정치에서 ‘대연정’이 모색되었다면, 경제에서는 ‘한미FTA’가 추진된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집권 책임자의 위치에서 새로운 시대적 과제를 모색해 온 것 같다. 시대정신의 대전환을 인지하고 새로운 과제로 전환했다기보다는 국가운영을 책임지는 위치에서 느끼는 현실성 때문에 한미FTA 추진을 결심했을 것이다. 여기서도 지지 기반세력에게 설득하거나 장기적 전략을 공조하면서 진행하는 것을 거부하고 승부사식(式) 추진이라는 노무현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이남주 교수가 지적하는 대로 “노무현 정부는 복잡한 논의를 완전히 무시했고, 한미FTA를 일방적이고 독단적인 방식으로 결정”하였다. 한미FTA 추진을 한국사회에 새로운 문제를 제기하는 방식으로 판단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정치세력 내부에는 격렬한 충돌지점이 확인되었다. 첫째, 한국사회에서 진보개혁세력이라고 부르는 조직의 실체가 드러나게 되었다. 거칠기는 하지만, 시장경제와 개방을 인정하는 우파와 국가의 개입과 통제를 기본으로 하는 좌파가 진보개혁세력이라는 통칭으로 불려왔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소위 ‘사민주의자’와 자유주의자 사이에 균열현상을 목도하게 된 것이다. 둘째, 정치세력이 집권을 하고자 한다면, 새로운 경제발전 모델을 제시해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박정희의 근대화 개발모델이 파탄을 맞이한 IMF외환위기 이후, 새롭게 경제발전 모델을 모색하는 단계에서 한국으로 밀고 들어오는 ‘신자유주의’를 적절하게 방어하면서 한국 경제의 문제점을 글로벌 기준에 맞추어가는 중첩된 과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한미FTA를 통해 새로운 발전모델을 숙고하기 시작했다. 셋째, 정책 결정의 구조와 방식에서 엄청난 시각 차이를 확인하였다. 한국사회는 정치적 쟁점이 첨예해 지는 경향이 있지만, 한미FTA 추진을 ‘민주주의 위기’로 규정하는 입장에서는 ‘목숨을 건 단식’으로 맞섰기도 했다. 또한 한미FTA를 매개로 삼아 대통령과 차별성을 부각시키기 위기도 했다.
노무현 정부가 한미FTA를 정치적 논리가 아니라 한국경제의 미래에 대한 고민의 결과라고 하는 주장은 일고의 가치도 없다고 생각한다. 한미FTA 추진은 단순히 경제적 사안에 불과할 수가 없는 문제로 한국사회 전반을 변화시키는 이슈임에 틀림없다. 정말 경제적 문제에 국한된 문제에 격렬하게 대응했다면 모든 정치세력이 ‘바보들의 행진’에 동참한 꼴이다. 한 나라의 미래를 결정하는 정치적 의제를 정치적 파트너가 없는 상태에서 추진한 것은 정말 이해하기 어렵다. 한때, 노무현 정부는 12개의 위원회 조직이 남아 있기에 건재하다고 하는 소문도 있었다.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했다는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있습니다”라는 상소문에 빗댄 비유는 사방 어디에도 정치적 파트너가 없다는 상황과 일치한다. 새롭고 유연한 진보이념으로 나아가자는 전환의 신호를 한미FTA를 통해 제기했다는 분석이 있지만, 정치전략 기본원칙에서 너무나 유리된 정책의 추진으로 실효성을 찾기 어렵고, 정치세력과 결합되지 않은 정치적 제안이라는 성격에 따라 그러한 주장은 설득력을 가지기 어렵다.
이남주 교수가 지적하는 것처럼 “한미FTA는 지지기반이 취약해진 상태에서 노무현정부내에 새로운 담론지형을 만들어낼 구심점도 없었기 때문에 한미FTA추진으로 새로운 정치적 동력을 이끌어 내는 것은 불가능했다”는 평가는 기본적으로 타당하다. 하지만, 한미FTA 추진은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진보이념이 나아갈 길에 대해 크게 시사하는 바가 있었다. 비록 정치세력화의 계기나 실체로 발전하지는 못했지만, 집권을 위한 주류세력이 되려고 하는 정치세력은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철학과 관점이 필요하다는 것을 제기했다. 결국 한미FTA 추진은 한국정치에서 ‘민주화 시대’가 마감하고 ‘새로운 시대’로 진입을 상징하는 사건이 되어 버렸다. 이제 새로운 진보의 재구성에서 한미FTA라는 의제를 빠뜨리고 갈 수가 없게 되었다.
7. 새로운 정치연합은 가능한가?
이남주 교수가 아쉬워하는 2007년 2월~3월에 진행된 진보논쟁은 대단히 중요한 것이었다. 2006년까지 진행된 노무현 방식의 문제제기가 결심을 맺어야 할 시점이었기 때문이다. 노무현 대통령 자신이 표현했던 방식으로 표현한다면 “정치는 대세보다 대의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대의의 중요성 하나로 온갖 문제제기를 선도적으로 진행해온 노무현 대통령은 2007년 2월 열린우리당 전당대회가 개최될 쯤에서 그동안 강조해 온 ‘대의’를 접고 현실적인 ‘대세’의 흐름을 인정해 버리고 말았다. 노무현 정부가 추진해 온 정치 사업들이 전체적으로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없었지만, 미래를 위해서 투자하는 측면이 있었다고 믿었는데, 과거의 방식을 회개(悔改)하고 대통합으로 전환하고 말았다. 선도적인 문제제기 방식으로 정치투쟁을 벌려왔던 노무현 대통령이 전통적인 대중노선으로 소위 ‘민주대연합’의 방식으로 급격하게 선회한 것이다. 이제까지 제기한 새로운 진보이념과 과제가 정권재창출의 논리에 굴복하고 말았다. 임종석 전(前)국회의원이 당의장 경선에서 주장했던 구호처럼 “정권재창출이 최고의 개혁이다”라는 주장에 동조하는 과정으로 나아갔다.
노무현 대통령은 레임덕이 없는 대통령을 자부해 왔는데, 대통합세력의 흐름에 순종하는 자세를 취했다. 참여정부에 대한 정치공세를 방어하기 위해 ‘참여정부평가포럼’(참평포럼)이 결성되자, 일부에서는 정치세력화의 모색으로 해석하기도 했지만, 현실화하기에는 시기적으로 너무 늦었고, 고립된 역량의 한계와 정치세력을 이끌고 있는 개혁파 지도자들은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환상으로 선거참여 기조로 전환하고 당통합에 합류하였다. 노무현 대통령이 제기했든, 암시했든 ‘새로운 진보’의 모색은 6월 참평포럼 강연회를 끝으로 정치적 과제에서는 사라지게 되었다.
이남주 교수가 규정한 “노무현 정부의 정치적 실패”를 인정한다. 노무현 정부의 5년 과정 전부가 실패는 아니었다. 그러나 중반기에 시도한 각종 정책과 문제의식이 종결되는 후반기가 너무나 상이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2006년 말에서 2007년 초에 새로운 진보를 본격적으로 제기하고 새로운 정치적 모색을 지원할 시기에 정치적 대세에 순응해 버렸기 때문이다. 그동안 노무현 대통령의 정책을 좌충우돌로 표현하고, 적을 이롭게 한다는 이적행위로 비아냥거림에도 불구하고, 용인되어온 것은 미래적 지향을 분명하게 하고 조직적으로 분화할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최소한 절반의 성공을 전제로 진행된 문제제기가 완전한 실패처럼 느낄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노무현 정부의 평가 작업은 노무현정부의 성패를 따지는 것을 넘어 진보개혁이념을 혁신하고, 재구성하는 데 도움을 주는 방향으로 진행되어야 한다.
이남주 교수는 “정치적 실패는 첫째로, 당정분리같은 자신의 지지 세력을 동원하고 결집시키는 정치 전략이 부재했고, 둘째로 대연정, 한미FTA 같은 ‘빅아이디어’식 해법으로 지지 세력을 주변화, 균열시켰다. 셋째로 지지기반의 전면적인 붕괴로 이어졌는데, 진보개혁세력을 새로운 정치적 주체로 만들겠다는 초기 구상은 포기되었고, 점차 관료의존도가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정책적인 차원에서는 트라이앵귤레이션 같은 접근은 의미 있는 시도였지만, 정치 전략적 측면에서 이러한 접근이 효과적으로 작동할 수 없도록 만드는 선택을 반복했던 것이 정치적 실패의 가장 커다란 원인이다”라고 지적하지만, 중요한 몇 가지를 놓치고 있다.
첫째, 노무현 정부는 시대정신의 전환을 정확하게 인지하지 못했지만, 노무현 방식으로 새로운 의제를 제기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트라이앵귤레이션’이라는 정치 전략이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정치 전략이 부재했다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한다. 대통령의 개인적 경험에 의존하는 독특한 리더십에서 비롯된 선도적 문제제기 방식, 또한 청와대 비서실의 정무기능이 부재, 집권세력으로 갖추어야 할 기본 관점과 능력의 불비로 인한 관료들에게 의존함으로써 새로운 정치적 과제를 전략적 차원으로 발전시키지 못하고 단편적인 정책과제로 병렬적으로 제기하는 수준에 머물고 말았다는 것이다.
둘째, 노무현 정부를 거치면서 진보개혁세력의 분화가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막연하게 단일한 조직적 실체로 인식해 왔던 민주화 세력이 2004년 민주노동당의 원내 진출로 조직적 분화가 시작되었다. 또한 진보개혁세력이 민주화 시대 이후의 정치적 과제에 대해 준비하지 못했다는 것을 증명되었다. 2007년 대선 결과는 노무현 정부에 대한 심판일 뿐만 아니라 진보를 표방한 세력전체에 대한 심판이었다.
셋째, 새로운 가치, 이념의 필요성을 부각시켰고, 준비된 집권을 해야 한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노무현 정부는 집권 후반기에 ‘비전2030’이라는 종합적인 재정계획과 미래전망을 제시했는데, 너무나 때늦은 정리였다. ‘비전2030’이 옳은 방향인지 잘못된 방향인지를 잘 모르지만, 종합적인 전망을 제시했다는 측면에서 보면, 노무현 집권 5년의 결실이라고 하는 것이 현실적일 것이다. 그만큼 집권하기는 쉬워도 집권 이후에 통치하기 어렵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 완벽하게 준비된 정부는 있기 어렵지만, 최소한 나라을 이끌어갈 방향과 과제를 정리한 정치세력이 집권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이남주 교수는 “한국정치를 구보수, 온건개혁, 진보 등으로 3분하는 창조적 분열을 주장”하는 것에 대해 “‘진보’적 정체성 강화만으로는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지지도 차이라는 공백을 메울 수 있는 정치세력의 발전을 기대하기 어렵다”고 정리하고 있다. 온건개혁세력과 진보세력의 구분이 분명하여 진보세력이 독자적인 정치세력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는 주장은 2007년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노동당’의 실패를 설명하기 어렵다. 특히 한국 정당체계가 ‘양당제’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을 망각한 사고다. 영국은 좌파가 진보를 대변하고 있지만, 미국에서는 좌파는 현실정치에 참여할 수 없는 양당제다. 한국은 비례대표제도에 의해 ‘민노당’이 현실정치에 진입할 수 있었지만, 점점 고립된 좌파정당으로 기울어가고 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우파에 기반을 둔 양당정당체제로 전환될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핵심은 진보적인 우파정당을 건설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전통적 ‘민주대연합’ 노선으로 ‘정치연합’을 모색하려는 시도는 기득권을 가진 호남 지역당에 플러스 알파(+α)의 역할을 해왔다. 2007년 대통합민주신당이라는 긴 기찻길 당명으로도 대참패를 했다. 진보를 민주세력연합 과정에서 역할(?)을 통해 정치적 역량을 평가받는 세력으로 보는 것은 과거의 관성에 의존하는 사고다.
이남주 교수는 “노무현 정부와 차별성을 강화하는 방식과 신자유주의 반대라는 구호로 진보정당의 실패를 극복할 수 없다”고 했다. 전적으로 동의한다. 또한 “세계화와 분단체제의 동요라는 환경에서 작동할 수 있는 실현가능한 비전과 노선을 만들지 못하면, 진보개혁세력은 잔여적 위치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라는 지적에 동의한다. 따라서 현재 진보를 자처하는 좌파세력은 새로운 진보세력으로 거듭나려고 한다면, 이념적 편향을 극복하고 현실적으로 집권 가능한 비전과 정책대안으로 무장해야 한다. 21세기형 집권 가능한 진보정당으로 결집하려면, 가치 중심, 의회중심, 민주적 운영에 동의해야 한다. 한국정치세계가 지역기반 거대정당체제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폭넓은 연합의 구축’이라는 당위성은 종종 배반을 당한다. 그러기 때문에 집권 가능한 진보적 가치를 중심으로 진보를 재구성하고 새로운 정치주체를 세워서 진보개혁진영을 주도적으로 재편해야 한다. 시대정신! 시대적 과제를 해결할 수 있는 비전과 능력을 갖추는 것이 진보개혁세력 앞에 놓인 선결적 정치 과제라는 것을 공감하면서 노무현 정부의 평가가 그 첫걸음이 되길 바란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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