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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주 교수 비판-참여정부가 실종시킨 노동개혁은 무엇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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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2217) | 추천 (1) |점수 (5) | 2009-04-15 12:29:20 노항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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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주 교수의 < 노동정책, 사회통합을 위한 노동개혁의 실종> 토론문-
노항래(사회디자인연구소 이사) 생각과 경험이 비슷한 사람끼리 세밀한 차이를 따지고 같은 점 보다 다른 점을 우선 살피는 것이 옳은 것인지 돌아보게 된다. 굳이 문제 삼지 않으면 아무 일 없었던 듯 넘어갈 수 있는 문제를 긁어 부스럼 만드는 것은 아닌지 걱정도 되고, 손을 잡고 연대해야 할 상대를 밀어내는 것은 아닌지 조심스러워 지기도 한다. 하지만, 오직 더 많은 공감과 더 굳센 연대를 위해서, 더불어 함께 나아가기 위해서 때로는 차이를 살피고 의문은 제기하기도 한다. 이 글 역시 그런 글이다. 대통령후보 시절 노무현의 노동특보였고, 제 17대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서 사회문화분과 전문위원을 맡았으며, 참여정부 첫 노동비서관이었던 박태주 한국노동연구원 교수가 <노무현 시대의 좌절> 제 7장에 (참여정부의) ‘노동정책, 사회통합을 위한 노동개혁의 실종’이라는 글을 공개 발표했다. 그 글 머리에는 이미 2년 전에 이 글의 초고가 있었다고 한다. 노무현 대통령의 재임기에 그가 이끈 정부의 노동정책에 대한 신랄한 비판의 글이 씌어진 것이다. 이 때 쓴 글을 수정하고 요약한 것이 ‘노동정책, 사회통합을 위한 노동개혁의 실종’인 듯 하다. 박 교수의 글은 신랄하고 비판의 대상에 대해 단호하다. 그는 참여정부의 노동정책이 ‘개혁으로 포장된 갈등정책’, ‘사회통합을 내건 신자유주의 정책’이며 ‘사회통합은 커녕 사회해체의 위기를 유산으로 남긴’ 노동정책이었다고 규정한다. 그리고 이런 평가를 가능하게 하는 참여정부의 노사관계 정책과 노동시장 정책을 살피고, 거듭 “개혁 조급증이 ‘나홀로 개혁’을 추진하게 만들었고, 그것이 벽에 부딪히자 노동배제적 노동정책으로, 그리고 신자유주의적 시장기능에 대한 의존으로 되돌아갔다”고 평가한다. 그리고 대안을 말한다. 다시 노무현 정부 초기의 개혁과제를 되돌려 사회적 대화, 비정규직 보호정책의 내실화 등을 통해 중층적 노사관계(이는 현재의 기업단위 노사관계를 산업업종 중심의 노사관계로 전환하는 것,또는 산업.업종 중심의 노사관계를 강화함으로서 기업단위 노사관계를 보완하는 것을 의미한다) 구현과 노사간의 계급타협을 토대로 하는 유럽식의 사회적 시장경제, ‘조율된 시장경제’를 실현해 가야 한다는 것이다. 박 교수의 비판은 ‘좌회전 신호 넣고 우회전으로 일관했다’는 비판론의 전형이다. 노무현 정부 초기(또는 선거운동 과정의 공약이나 대통령직인수위의 국정목표) 설정된 개혁과제는 실종되었고 목표인 사회통합은 무망한 채 사회는 더 분열되고 양극화했다는 것이다.
필자는 박 교수의 비판이 매우 주관적이라고 생각한다. 사실과 부합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의 과제, 특히 노동부문의 과제를 새기는데서도 균형있고 적확한 의제를 제기하고 있지 못하다고 본다. 집권 4개월 만에 노동정책의 파탄? 황당한 주장
참여정부의 노동정책을 노동개혁을 모색한 4개월과 그렇지 않은 나머지 기간으로 구분한 박 교수의 평가는 재미있다. 그 자신이 청와대에 몸 담았던 4개월과 그렇지 않은 나머지 기간을 나누는 셈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그가 청와대에서 노동비서관으로 재직하고 있는 동안 노동개혁을 위한 모색에 몸부림쳤고 의지를 불태웠다는 뜻이기도 한데 그것이 참여정부 노동정책의 구분점이 될 수가 있을까? 참여정부 출범 4개월 여가 지난 6월말 철도노조의 파업이 있었고, 그 파업 첫 날 파업 노동자들을 강제 연행하는 공권력 투입이 전격적으로 집행되었다. 과거 권위주의 정권 시절, 또는 앞선 정부였던 국민의 정부 시절 수도 없이 보여진 장면 그대로다. 그렇다고 해서 그 사건이 참여정부가 반노동자 정권으로 성격을 전환한 증거일까. 필수서비스를 담당하고 있는 대형 공공부문 노조의 집단행동을 방치하는 것이 옳은지, 당시 쟁점이었던 철도산업의 공사화 과정에서 신분보장(공무원에서 정부투자기관 직원으로 전환되는데 따른 고용안정의 보장) 요구에 대한 대응, 연금불이익 우려(공무원연금 대상에서 퇴직금제도 및 국민연금 대상자로 전환되는 데 따른 변화)에 대한 합리적 보전방안을 두고 드러난 갈등은 어떻게 조정하고 합의를 이끌 수 있는지 당시 그러했던 것 처럼 지금 다시 복기해 보아도 여전히 논란거리일 수밖에 없다. 그런 갈등이 있기 전까지 <국민의 정부>의 철도산업에 대한 태도는 철도산업을 시설과 운영으로 나누어 운영부문부터 민영화한다는 것이었다. 노동조합이나 진보적 시민사회단체 등은 영국 보수당 정부의 철도 민영화가 초래한 부정적 결과 등을 예로 들며 격렬히 반대했고, 그 와중에 대통령 선거가 치루어졌다.(국민의 정부는 같은 방식으로 전력산업 민영화 전략 = 전력산업구조개편을 추진 중이었고, 노조나 진보진영의 입장은 유사했다.) 참여정부는 집권 초 전력과 철도의 민영화 정책을 전환했고, 그 대안이 공사화였다. 민영화 방침을 철회하는 대신, 철도운영의 합리성,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서 기존의 공무원 조직을, 자율책임원칙에 따라 상대적으로 독립적인 정부산하기관으로 지배구조를 개선하는 방안이었고, 국민적 지지도 적지 않았다. 그렇게 큰 방향이 확정되었다. 그러고 나서 어쩌면 부수적인 조합원 신분전환, 연금적용방식에 대한 논란이 마침내 대규모 파업으로 번져간 것이다. 노조의 파업은 당시 법률로 불법이었고, 대규모 공공부문 노조의 파업에 대한 국민적 우려 역시 컸다. 그리고 예의 공권력 투입이 결정되었다. 집권 초, 그러니까 박 교수가 청와대 노동비서관을 담당하던 시절, 친노(勞) 정부 논란은 대통령선거가 끝난 직후부터 주요 언론의 가장 큰 담론 중 하나였다. 편향된 정부라는 것이었다. 카드대란 속에 실물경제의 위축 현상이 뚜렷한데, 정부는 기업의 투자나 기업활동에 대해 적대적이고 노동자층만 돌본다는 지적이었다. 실제 참여정부는 친노(勞) 정부도 아니었고, 기업에 대해 적대적이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참여정부 = 친노(勞)정부’ 담론은 일부 언론의 주도로 끊임없이 이어졌다. 그런 와중에 5월초 화물연대 파업, 6월말 철도파업이 연이었다. 당연히 노조의 불법파업을 방치해야 하는가에 대한 논란이 집권세력 내부에서 있었을 것이고, 화물연대 파업에 대한 대응과 달리 정부는 전격적인 공권력을 통한 제압에 나섰다. 그래서 참여정부는 친노정부에서 반노정부로 전환되었는가. 그 이전을 친노정부 운운한 평가가 어불성설인 것 처럼, 철도노조 파업에 대한 대응이 정권의 성격, 노동정책의 전환을 판단하는 잣대라고 주장하는 것은 사실과 다르고, 과도한 해석이다.
2003년 참여정부 초기 5월초 화물연대 파업과 6월말 철도노조의 파업에 대한 대응이 달랐던 점을 이해하려고 하면 못할 것도 아니다. 두 파업 모두 법률적으로 법률의 허용 밖에서 이루어진 것이지만, 당시 화물연대의 집단행동이 생존권적 절실함에서 비롯되었다면, 철도노조의 파업은 노조의 관성이 만든 파업이라고 말해도 틀리지 않다. 화물연대의 집단행동에 대해 대화기조를 지키면서 쟁점이었던 운송료의 개선, 권리 확대, 지속적인 협의틀 보장 등을 약속하고 보장하며 정부가 직접 대화의 당사자로 나서서 상황을 마무리한 반면, 철도 공사화 문제에 대해 협의가 진행되었고 노조의 요구를 충분히 수렴한 후에 다시 불거진 철도노조의 조합주의적 이해를 관철하기 위한 파업에 대해 단호히 대응한 것을 두고 정책기조의 전환인 것처럼 이해하는 것이 부적절하다고 본다. 2003년 6월 말 철도노조의 파업에 관한 한, 공공부문 노동조합의 책임에 대한 사안, 노동조합 행위의 적절성을 엄정하게 평가할 필요도 있다고 본다. 되짚어보면, 2003년 5월 포항, 부산, 울산 지역을 중심으로 폭발적으로 터져나온 화물연대의 집단행동에 대한 수습 이후, 그와 같은 대규모 분쟁이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던 화물차주의 문제-규제실패에 따른 공급과잉, 영세 운송업체의 난립, 도급구조의 전근대성 및 이러한 제도적 결함과 고유가 등이 겹쳐 구조화한 화물차주의 수익 악화 등-에 대한 근본적 개혁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이로부터 화물연대의 집단행동이 매년 반복적으로 일어나고 미봉수습책만 연이은 것은 엄정히 평가해야 한다. 이런 점이 역량의 한계를 드러낸 대표적 사례의 하나가 아닐까 한다. 하지만 여전히 ‘전부 아니면, 전무’식의 평가는 정당하지 않다. 예를 들면, 공무원의 단결권 보장, 외국인노동자 산업연수생제도의 폐지와 고용허가제의 도입, 필수공익사업장의 직권중재제도 폐지와 필수유지업무제도의 신설 등 역시 성과와 한계라는 점에서 살필 수 있을 것이다. 이를 공무원의 단체행동권을 보장하지 않았으니 진전이라고 할 수 없다던가, 외국에서 시행중인 노동허가제가 아니어서 의미가 없다고 평가할 수는 없는 것이다. 무릇 제도의 신설이나 개선은 사회적 공감을 토대로 국민일반의 용인이 있을 때 성취할 수 있다는 것은 당연하고, 그러한 국민일반의 사회적 인식을 높이는 것은 전체 사회세력, 소위 ‘진보’를 자처하는 세력이 공유해야 할 과제일 뿐이다. (이들 사안과 관련, 공무원의 단결권 범위를 확대해야 하고, 고용허가제 역시 외국인노동자의 선택권이 매우 제한적으로만 허용되고 악용될 소지를 개선해야 하며, 공익사업장 노동자의 단체행동권을 제한하는 필수유지업무제도가 ‘국민의 안전과 생명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업무’로 입법취지에 맞게 제한되어야 한다는 문제인식은 각각의 사안 입법 과정에서 검토되고 논의되었던 바 있고, 그 당시의 문제인식을 현실화하기 위한 노력이 절실하게 요구되고 있기도 하다.) 참여정부의 노동정책은 집권기간 내내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박 교수가 지적하듯이 노사관계의 안정화와 노동시장의 유연(안정)화를 지향하면서, 참여와 협력, 대화와 타협의 노사관계를 실현하고 노동시장의 취약계층을 보호해야 한다는 문제인식은 후보 시절부터 집권 5년 기간 내내 바뀌지 않았다. 대통령 자신의 언급이 후보시절에는 노동조합 일반에 대해 비교적 온정적인 태도를 보이다가, 대통령이 된 후 민간대기업이나 공공부문 노동조합의 책임성에 대해 몇 차례 언급한 것이 “일관성이 없었다”고 매도할 일인가. 박태주 교수가 직접 참여하기도 한 <인수위원회>가 살핀 노동정책의 과제는 매년 그 해 노동정책의 목표로 반복해서 확인되었고, 부족할 수 있지만 그를 실현하기 위해 몸부림쳤다고 표현해서 지나치지 않다. 물론 참여정부라고 할 때 대통령과 참모만을 일컫는 것일 수 없고, 그 점에서 대통령 권력, 그의 정치적 비전을 집행하는 행정부, 대통령의 정치적 가치를 함께 책임져야 할 집권여당의 정치인 등이 같은 문제인식과 절실함으로 대응했는지는 또 다른 평가를 요한다. 여기서 ‘문제인식을 5년 내내 유지한’ 집단이라 함은 그 셋 모두라기 보다는 대통령과 그와 정치적 가치를 공유한 무정형의 집단을 기준으로 한다. 물론 박태주 교수를 포함한다.
성공했는가를 묻는다면 다양한 평가가 있을 수 있다. 필자 역시 실패했다고 생각한다. 노사관계는 여전히 구태의연하고, 노동시장은 불공정하고 차별이 엄존한다. 이를 바꿀 수 있을 만큼 노/사/정이 미래지향적이고 발전적인 문제인식을 쌓아온 것도 아닌 듯 하다. 그러나 이는 참여정부의 다른 부문 정책에 대해 그러하듯 정치의 실패일 뿐, 정책의 실패라고 평가하기 어렵다. 박 교수의 글이 실린 책의 제목처럼 그것은 한 시대의 실패일 수 있고, 5년의 한계일 수도 있다. 그 실패 또는 한계는 대통령에게 또는 그 주위의 정권 주체세력들에게만 물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시대를 구성하는 여러 세력, 주체의 실패를 짚을 일이다. 특히 노사관계의 양 주체인 기업인과 노동자, 좁게는 기업가단체와 노동조합의 실패를 빠트릴 수 없다. 기실 집권 5년 동안 노사관계, 노동시장을 획기적으로 바꾸어서 집권 이전에 비해 전혀 새로운 노사관계, 노동시장을 이룰 수 있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넌센스다. 노사분규의 이원화와 노정갈등의 심화 정규직 노동자의 집단행동은 줄어드는데 비정규직 관련 분쟁은 늘어나고 장기화한다. 틀림없는 사실이다. 정규직 노조의 근로조건이나 고용보장을 주장하는 분쟁이 줄어드는 것은 그들의 투쟁이 더 이상 과거와 같은 사회적 지지를 받을 수 없는 현실을 정규직 노동자들이 모르지 않기 때문이고, 그만큼 정규직노조의 격렬한 파업이나 집단행동도 줄어들고 있다. 이에 비해 비정규직 문제를 둘러싼 사안별 갈등이 늘어나고 있고, 때로 비정규직 문제의 상징처럼 떠오르기도 했다. 화물연대, 기륭전자노조, 포항건설플랜트노조, 이랜드-뉴코아노조, 철도노조 KTX 여승무원지부, 코스콤비정규직노조 파업 등이 매년 연이어졌다. 그런데 이것이 참여정부의 잘못된 정책 탓이라고 말하는 것은 합리적이지 못하다. IMF 위기와 위기극복 과정에서 누적된 문제가 드러나는 것이고, 그로부터 분규의 이원화 현상이 비롯되고 있다. 이런 현상은 앞으로도 거듭될 것이다. 과제는 노동시장의 이중구조화를 완화하는 방향으로 이를 해결해 가는 것이다. 사안별 갈등은 줄이고, 전체 문제의 합리적 해결방안을 일관성 있게 지속하는 것이다. 당연히 정규직 노동자의 과보호 상황이 있다면 이에 대한 합리적 조정이 필요하고, 불합리한 시장경쟁의 열위자이면서 아무런 보호장치도 없는 정글에 놓인 비정규직 등 취약근로계층의 권리증진, 소득보전 대책이 이루어져야 한다. 참여정부가 제대로 했는가를 되물으면, 미흡하다고 그리고 결과적으로 큰 진전이 없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현상은 단기간에 바로잡을 수 없다. 결국 일관된 문제인식이 있었는가를 묻는 것이 옳다. 참여정부가 문제인식은 있었으나 게을렀던 것은 역시 공공부문의 내부 혁신, 대기업 및 일부 전문직 분야의 상대적 고임금 문제(독점적 지위에 따른 이익의 내부자 전유)를 바로잡지 못한 것이다. 공공부문의 내부 혁신은 당연히 공공부문 종사자 근로조건의 적정성 여부를 포함해서 업무목표, 관행, 대민서비스 등 제 분야의 여러 개혁과제를 포함한다. 물론 시장의 여건을 감안한 지배구조의 개편 역시 이데올로기적 잣대를 들이대며 근본적으로 가/부를 판단할 사안도 아니다. 참여정부가 이전 정부의 민영화 계획 등에 대해 부정적이었던 점과 공공적 지배구조를 유지하는 결정은 매우 큰 논쟁사안이다. 그러나 민영화 정책을 폐기하거나 일정을 재조정한다고 해서 다른 개혁 과제마저 사장되는 것은 아니어야 했다. 더 적극적이어야 했고, 내부 혁신의 성과를 가시화해야 했다. 특히 독점적 시장에서 얻는 이윤에 대한 내부자의 담합적 분배는 바로잡아야 한다. 대기업이나 일부 전문 산업부문의 독점적 이익 전유 역시 마찬가지였다. 현재 노동조합의 주력 부문이기도 한 민간대기업, 공공부문, 금융 등 전문직 부문의 일부 노동계층에 한정된 상대적 고임금, 안정적 고용보호, 그리고 노동조합이나 노조의 단체협약을 통한 경직적 경영행위 제한(배치전환 금지 등)에 대해 부분적 완화 역시 마땅히 필요했다. 특히 이들 일부 부문에 한정된 연공급적 임금체계 등은 조직의 혁신,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가로막는 요인 중 하나이고 이를 개편하는 것은 기업의 필요이고, 전체 사회적 과제이기도 하다. 참여정부 역시 거듭 그 필요성을 언급했으나, 실제로 의미있는 혁신에 성공하지 못한 점은 엄정하게 평가해야 한다. 그리고 이는 국민 일반의 정부 정책 전반에 대한 불신의 한 요인이기도 했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이에 비해 비정규직, 영세사업부문, 취약근로계층의 권리증진과 노동조건 개선에 대한 응당한 노력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과제였다. 이 점에서 참여정부의 노력이 없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사실과 다르고 객관적이지도 못하다. 기대만큼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고 말하는 것이 옳다. 다만 비정규직 보호법제의 입법, 사회적 일자리 사업, 사회서비스부문 육성에 대한 문제인식, 실업급여 수급률 확대 등 사회안전망의 강화 등등을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어야 한다. 물론 그러한 대책들이 새 정부 출범과 함께 중단되거나 약화하고, 애초의 계획대로 집행되지 못한 결과는 짚어야 하겠으나, 역시 매도하고 부정할만큼 문제인식이 부재했던 것도 아니었다. 한편, 필자는 참여정부 시기에 있었던, 몇몇 비정규직 노조의 투쟁이 박 교수가 의미를 부여하는 것처럼 우리 사회 비정규직 문제의 본질, 그를 해결하기 위한 합리적인 방안을 의미있게 제기한 투쟁인지 의문을 갖는다. 이들 투쟁이 노동조합의 전통적 행위양식- 집단행동을 통한 사회적 여론 환기, 감정적 대치를 포함하는 극단적 갈등, 정치적 문제해결 방안에 접근 등-을 반복했는데, 해당 사안의 해결에 유효한 방식이었는지 평가해야 하고, 또 한편으로는 이것이 전체 비정규직 문제의 모든 것인 것처럼 인식되어야 하는지도 살펴야 한다. 수많은 타협과 조정 가능성은 모든 사안마다 제기되었다. 그에 대한 수용/불수용의 문제는 원칙의 문제라기 보다는 역량과 조건의 문제다. 누적된 불합리를 해결해가는 주체의 합리적이고 지혜로운 선택이 필요한 것이었으나, 노동조합운동은 매번 원칙, 이념의 문제로 대응하지 않았던가. 어쩌면 이들 부문이 다른 대다수 비정규직들의 처지와 다른(사업장의 상황이든, 문제제기에 나선 노조의 주체든) 특수한 상황의 결과가 아니었던가. 더구나 이런 몇몇 비정규직 문제를 둘러싼 장기분쟁을 전체 비정규직의 문제로 일반화하고 이에 대한 정부의 대응을 전체 비정규직 문제에 대한 정부의 무대책, 신자유주의, 민주주의의 위기 등으로 일반화하는 것 역시 설득력이 없다. 박 교수의 지적처럼 노동시장은 이중구조화되었다. 오랫동안 누적된 결과이고, 그 만큼 긴 기간을 통해 해결해 가야 한다. 이를 해결하기 위한 각 주체의 동반 노력이 필요하다는 점 역시 명백하다. 그 긴 기간동안 지속되고 심화되어야 할 확고한 인식 역시 필요하다. 참여정부는 그 단초를 제기했고, 긴 여정을 시작한 정부였다. 정부의 문제인식이 철저하지 못하고, 정책대안도 미흡했다 할 수 있지만, 그 역시 정부 혼자 하는 것이 아니다. 기업주의 변화, 노동계의 새로운 접근 역시 필요한 것이었고, 그런 변화를 위한 노력을 부정할 것만도 아니지 않은가. 사회주체들이 함께 책임지는 민주주의 여전히 개혁독재를 통해 구악을 청소하지 못했느니 정부가 주도해서 노사관계의 틀을 바꾸지 못했느니 평가하지만, 그것이 사회를 개혁하는 방안일 수는 없다. 더구나 지금 한국사회의 개혁방안은 더더욱 아닐 것이다. ‘위로부터의 변화를 추동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박 교수의 인식은 노사관계의 전환 과제를 실현하는 데서도 똑같이 적용되는 평가기준이어야 한다. 사회적 대화가 불임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노사정위원회의 정상화가 실패한 것일 뿐이다. 그 실패의 책임은 노/사/정에게 분담되어야 한다. 참여정부는 수다한 사회적 대화를 추진했고, 성과도 없지 않았다. 미시적인 갈등사안의 조정도, 국민연금 개혁과 같은 제도적 과제도 사회적 대화를 통해, 또는 그런 대화를 통해 보완하며 정책결정이 이루어졌다. ‘민주정부 10년’ 간 있었던 이런 노력을 정당하게 평가해야 한다. 더구나 ‘비정규직법안 발의’나 ‘노사관계 법제도 선진화 방안’의 제시를 사회적 대화를 포기하고 신자유주의, 노동배제적 노동정책을 채택한 증거라고 주장하는 것은 황당하기까지 하다. 노동계 일부의 선호에 맞는 정책이나 법안이 없어서 사회적 대화가 시작되지 못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왜 권력이 노조에 굴복하지 않았는지를 묻는 것과 다르지 않다. 참여정부는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보다 발전적인 사회관계를 성취하기 위한 ‘대화와 타협’을 부정하지 않았고, 누구보다 적극적이었다. 의지를 부정할 일이 아닌 것이다. 전략이 옳았느냐는 그 다음의 문제다. 이 점에서 대화와 타협, 참여와 협력, 자율과 책임의 노사관계를 선택하지 못하는 한국 노사관계의 일차적 주체인 노동계와 재계의 협소한 전망을 냉철히 살펴야 한다. 노사관계를 자기 이해관계를 관철하는 데 귀찮은 부속물로 삼고, 여전히 개발연대식 노사관계를 선호하는 기업주들의 협소한 인식은 물론, 87년 체제의 경험에 갖혀 소아적 이해관계만을 주장하고 대결의 악순환에 안주하는 조직된 노동계의 협소한 전망에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들이 사회적 대화의 진전을 가로막고, 노사정위원회의 정상화를 거부한 것이다. 기대만큼 참여민주주의가, 사회적 대화가 진전하지 못한 것은 우리 사회 민주역량의 수준, 민주화에 대한 사회 구성원들의 책임의식의 부족을 고스란히 반영한 것일 뿐이다. 민주주의를 ‘자기 것은 지키고, 남의 것을 조금 더 가져오는 게임’으로 생각하는 한, 민주주의의 내실있는 진전은 이룰 수 없다. 민주주의는 자기부터 사회에 대한 책임을 분담하는 것이다. 그를 위한 과정이 참여이고, 사회 각 주체(세력)의 참여방식이 사회적 대화이며, 그 한 양태가 노사정 대화체제일 것이다. 특히 이 점에서 노동계의 구태의연한 행태 역시 짚어져야 한다. 조직률 10%, 전체 노동자들 속의 대표성은 운위할 수 없는 지경인데, 선험적인 대표성 추인에 대한 요구 뿐만 아니라 권력과 자본의 선제적 굴복을 요구하면서 대화체제를 말하는 것은 낡고 고루한 보수적 태도에 다름 아니다. 더구나 조직 노동자의 대다수가 87년 이후 권리 증진의 결과 국제적 수준에 준하는 노동기본권을 보장받고 있으면서(물론 시비가 있겠지만, 이건 틀림없는 것이다) 그 권리에 안주해서, 전체 노동자의 90%가 처한 상대적 무권리 상태를 방치하는 것이고 외면하는 것이다.
재계, 특히 그 의사결정권을 독점한 일부 기업가 단체와 그 속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대기업집단(재벌)의 행태 역시 다르지 않다. 이들이 사회적 대화의 진전을 가로막은 일차적 주역들이다. 비정규법이 비정규직을 외면한 유연화 전략?
지금도 그러하듯, 참여정부 시기 노동정책과 관련한 최대의 논란 중 하나는 비정규직 보호법의 입법기준에 관한 것이었다. 그만큼 절실하고 영향력이 큰 의제였고, 논란과 갈등이 적지 않았다. 그리고 오랜 논란 끝에, 박 교수의 지적대로 ‘구절양장 같은 복잡한 과정을 거쳐’ 2006년 말에야 입법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그 전후에 두 번의 공공부문 비정규직 대책이나, 입법 외의 <비정규직 대책>이 수 차례 이어졌다. 이들 법제의 마련과 대책에 대한 박 교수의 평가 역시 냉혹하다. 이런 평가는 객관적인가.
비정규직 문제가 얼마나 중요하고 어려운 문제인지에 대해 논하는 것은 궁색하니 그만 두자. 필자 보다 박 교수가 더 많은 글과 주장을 남겨 놓고 있기도 하다. 이 문제에 대한 노/사의 주장, 우리 사회 다양한 여론주도층의 주장은 중구난방이다. 입법과정에서 그런 주의 주장이 난무했고, 정부가 바뀐 지금도 새로운 국면을 만들며 이어지고 있다. 시장에 맡기면 차별도 시정되고 불합리로 바로잡힐 것이라는 주장이 있는가 하면, 적어도 노동시장의 불합리를 수습하기 위한 국가의 극단적 개입이라는 극약처방을 주장하는 측도 있다. 그리고 그런 극단적인 주장들 사이에서 또 다른 다양한 견해들이 상충한다.
그런데, 틀림없는 것은 참여정부 시기 17대 국회의 입법은 방치된 시장에 개입하는 사회적 기준을 세운 것이다. 기간제 남용의 제한, 불합리한 차별의 금지, 계약책임 원칙 등 고용계약의 합리성 실현 등이 그 입법안에 포함되어 있다. 이런 걸 신자유주의 운운하며 비판할 수 있나. 더구나 당시의 입법안은 다른 나라의 비정규직 관련 고용기준에 비추어 보더라도 ‘너무 느슨한 기준 = 비정규직 남용의 허용’이라고 말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매우 진전된 개입이고, 이로부터 노동시장의 부분적 경직성도 감수할 수밖에 없는 기준이라는 평가도 있다. 문제는 입법과정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지금도 운위되고 있는 것처럼, 불합리한 주장들의 난립이다. “비정규직 제도화를 통해 비정규직 천지를 만들게 한 입법” 이라는 주장, “참여정부는 300만 명의 비정규직을 양산하고도 그도 모자라 ‘양산법’을 추가했다."는 민주노동당 어느 의원의 주장이 그 중 하나이다. 그런데 이 법안의 입법 이후 비정규직의 점진적 감소, 특히 당시 비정규직 증가를 주도한 기간제 근로자의 감소 경향이 확인되고 있다. 사실 박 교수가 인용하는 바와 같이 임시일용직을 모두 비정규직으로 추계하는 민주노동당의 집계 방식에 따르면 참여정부 시기 비정규직이 70-80만 명 정도가 늘었는데...... “모든 정규직들이 파견직 노동자로 전락할 것”(현재 고전적 의미의 파견 노동자는 통계청 조사결과를 원용하면 총 15만 명 정도에 그친다) 등의 주장이 진보세력, 노동계를 자처하는 이들 속에서 거듭되었고, 반대 진영에서는 ‘사회주의’라는 주장에서부터 “비정규직들을 돕겠다고 비정규직을 사지로 내 몬 입법”이라는 주장까지 어지럽게 연있고 있다. 이런 불합리한 주장과 태도가 합리적인 사회적 기준의 설정, 점진적인 노동시장의 합리화 구현을 가로막는 것일진대, 박 교수 역시 이런 주장의 일부를 논거로 지난 입법을 평가하는 것 같다. 박 교수가 비정규법의 내용이 미흡하다고 보는 주장 중 ‘사용사유는 제한하지 않고.. 차별시정의 주체나 판단의 기준을 제한한 것’이라는 내용 역시 당시 입법한 내용의 미흡한 점으로 적절한 지적인지 납득하기 어렵다. 차별을 금지하면서 ‘차별시정의 주체나 판단의 기준’을 마련하는 것이 당연하고, 비정규직 남용을 막는 기준으로 ‘사용사유 제한’이 반드시 포함되어야 한다는 주장 역시 도그마에 가깝기 때문이다. 연이은 비정규직 대책 역시 그렇게 폄하하고 무의미한 정책들이라고 혹평할 만큼 단순하지 않다. 당시 제반의 논의 지형과 실무적 검토를 감안할 때, 그리고 행정역량 등을 고려하면 상당한 의지의 반영이라고 평가할 점들이 없지 않다. 무엇보다 비정규직 남용의 제한, 상시고용의 권장, 차별해소를 위한 지속적 노력, 사회보험 적용률 등 고착화한 제도적 차별 시정의 필요성 등을 실현하기 위한 정책적 대응의 출발은 명백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노무현도 지키기 못한 진보개혁세력 박 교수의 글은 위에 적은 이런 주제들-노사관계, 사회적 대화, 노동시장정책, 비정규직 문제에 대한 대응 등-을 포함하여 훨씬 많은 사안들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노무현 정부의 노동정책 = 신자유주의, 노동의 위기를 이끈 진보에 맞선 개혁’이라고 총평한다. 필자는 과도한 주장이며, 박 교수의 주관적 인식을 덧칠하기 위한 무리한 주장들의 연속이라고 생각한다. 큰 기대와 그에 상응하는 비전이 있었으나, 성과는 기대나 비전에 미치지 못했다. 그래서 보다 냉정하고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평가가 필요하다고 본다. 오늘의 위기를 인식하기 위해서도 그러하고, 한국사회에 다시 새로운 진보개혁의 시대를 열기 위해서도 그렇다. 신자유주의 운운하는 낙인찍기 식 비판은 올바른 인식을 위해서도, 미래를 준비함에 있어서도 지양해야 한다. 박 교수의 글과 다른 평가자들의 글이 주장하듯 참여정부의 이러저러한 정책들이 철학의 부재, 목표의 이탈, 역량의 한계를 드러냈다고 평가하는 것은 그것대로 타당성 여부를 성찰할 일이나, 이들 각 부문별 정책의 한계를 노정하고, 오늘의 한국사회의 후퇴를 용인하게 된 것은 기실, 정치적 실패의 결과라고 봄이 타당할 것이다. 참여정부를 만든 대중적 열망은 컸으나 그를 내실있게 뒷받침할 세력은 박 교수가 충분했던 것처럼 전제하고 있는 만큼 크지 않았다. 기실 2002년 대선에서 이룬 정치적 승리가 매우 독특하고 의외의 것이어서, 더구나 1년 반 뒤 탄핵반대 대중운동까지 나타나면서, 진보개혁세력의 착시는 커질대로 커져버렸다. 진보개혁세력의 역량에 대한 과신, 국민대중 일반의 인식이나 경험의 협소함에 대한 인식부재가 분명했고, 한국사회의 진보개혁을 성취하기 위한 세력 결집의 절박함에 눈감은 채, 사분오열의 면모를 거듭 드러내었다. 무엇보다 민주주의적 토양의 미흡함, 역량의 한계를 직시하지 못했고, 각 이해집단의 무책임한 이익다툼을 제어하는 성숙함을 보여주지 못했다. 이 점에서 한국사회 개혁의 현재 우선 과제를 확고히 인식하지 못한 정권 주체의 한계와 과오를 부정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이 점 냉혹한 평가가 있어야 한다. 다만, 노무현 대통령을 필두로 한 당시의 권력집단은 기실, 그 권력의 토대이며 공유자인 여당으로부터, 진보개혁세력으로부터, 물론 진보를 자처하는 수다한 이익집단으로부터 철저히 고립되었다. 그리고 고립된 대통령 권력이 위기에 처할 때 마다 이들은 “나는 참여정부가 제시하는 개혁과 무연한 사람”이라고 외면하기 일쑤였다. 박 교수의 이런 글 역시 그런 외면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조망하면 그런 외면, 분열이 그나마 추진 가능했던 개혁의 깊이와 폭을 제한했다. 작은 개혁마저 후퇴시키고 되돌려 놓았다. 그리고 우리 사회 전반의 깊은 패배주의를 배태하는 토대가 되었다. 사실 노무현 때문에 정권이 바뀐 것이 아니라, 당시의 여당과 진보개혁세력의 무책임이 ‘경제’를 핵심 의제로 내세운 보수세력으로의 정권교체를 용인하고 인도한 것이라는 평가도 가능할 것이다. 박 교수의 이 글 역시 뒤늦은 그런 외면의 하나이고, 그래서 객관적이지 못할 뿐만 아니라, 무책임한 평가라고 나는 생각한다. 다시 노동정책의 과제를 살피면, 역시 사회통합적 노동정책의 구현이며, 대화와 타협, 자율과 책임의 노사관계를 한 걸음 씩 전진시키며, 노동시장의 양극화를 완화하고 취약근로계층의 권리와 노동조건을 개선하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 사회 진보의 길이고 참여정부가 걸음을 내딛다가 이루지 못한 채 남겨 놓은 길이다. 이 엄혹한 후퇴의 시기를 견디고 주체의 대오를 추스러 다시 시작해야 할 길이기도 하다.
이러한 새로운 도전이 가능하기 위해서 ‘지금 여기’ 한국사회의 문제를 직시해야 한다. 유럽의 이러저러한 경험과 이론에 우리를 끼워 맞추려 하지 말고, 우리 안의 전근대성, 학벌, 지역주의, 패거리문화, 권력행위에 대한 오만과 그와 쌍생을 이루는 권력에 대한 굴종, 무책임과 집단이기주의, 차별과 불합리 등 우리 안에 내재한 문제들을 성찰해야 한다. 이런 전근대성이 우리의 노사관계, 노동조합이나 기업주들의 행태 안에 고스란히 내재하고 있다는 점을 성찰하고 이와 맞서겠다는 투지와 새로운 전망을 준비해야 한다. 시대적 과제를 밀고가다가 좌초한 한국사회를 다시 밀고 나아가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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