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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간당원제가 정당개혁에서 차지하는 의미와 위상은 무엇이었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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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3674) | 추천 (0) |점수 (0) | 2009-01-21 15:42:26 김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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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간당원제가 정당개혁에서 차지하는 의미와 위상은 무엇이었나?
김두수(사회디자인연구소 상임이사)
1. 기간당원제, 타협할 수 없었나?
“실제로 열린우리당이 선거에서 패배한 것과 기간당원제 사이에는 아무런 인과관계가 없다. 선거 때마다 우리당은 위기상황이라며 지도부가 마음대로 공천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거에 패배할 때마다 지도부는 기간당원제 폐지를 개혁 방안으로 들고 나왔다. 개혁당원들은 여기에 밀리게 된 것은 처음부터 너무 이상적인 입장을 고집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외국에서도 지역과 소득에 따라 당비의 액수가 차이가 난다. 이런 차이를 무시하고 도시에서나 농촌에서나 일률적인 당비를 고집하니 정당원의 수가 급격히 주는 것은 당연하다. 지도부는 이것이 선거패배에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개혁당 측이 약간의 양보도 없이 타협을 거부하다가 끝내는 최악의 상황까지 몰리게 된 것이다. 이 세상에 최선은 없다. 차악이나 차선을 택하는 선에서 타협하고 양보하는 마음이 부족했다.” - 조기숙 ‘마법에 걸린 나라’ 2007
나는 2004년 6월경 ‘우리당 정치개혁특별위원회’에서 조기숙 교수와 함께 기간당원제 문제를 토론했던 사람 중에 하나다. 조기숙 교수의 이러한 평가에 대체로 동의한다. 지금도 어렴풋하게 기억하고 있는데, 조기숙 교수는 “미국의 경우에 당비라고 할 수도 있고 후원금이라고 할 수 있는 액수가 대체로 ‘1달러’ 이하가 대부분이다. 당비문제는 유연하게 가자”라고 했던 것 같다. 그때도 의견의 차이가 많은 경우에는 조기숙 교수의 조언으로 조율된 사안이 많았다. 그럼에도 한 가지는 해명을 할 필요를 느꼈다. “개혁당 측이 약간의 양보도 없이 타협을 거부하다가 최악의 상황까지 몰리게 된 것”이라는 조기숙 교수의 지적은 전체적으로 맞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적어도 초기에는 그렇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고자 한다. 나는 개혁당 출신(?)은 아니지만, 개혁당의 입장을 대변하였다. 왜 그랬는지는 1편에서 자세하게 소개했다. 내 나름대로 회고해 보면, 위원회 내부에서 날카롭게 논쟁하고 맞서기도 했지만, 나름대로 그때그때마다 타협한다고 한 과정이 기간당원제도였다. 2004년 8월, 중앙위원회에서 기간당원제도의 틀을 만장일치로 확정하고 기뻐했던 것은 대타협의 산물이었기 때문이다. 그 후에 격렬한 논쟁이 재연될 것이라고 그때는 아무도 상상하지 않았다.
그때 ‘정개특위’에서 있었던 타협의 한 사례를 살펴보면, 나름대로 타협의 산물로 ‘기간당원제’가 탄생한 것을 알 수 있다. 가장 쉽게 접할 수 있는 사례는 ‘당비문제’다. 그때도 “당비를 얼마로 할 것인가?”에서 큰 견해 차이가 있었다. 개혁당 출신들은 당연히 ‘1만원 납부’를 선호했다. 소액은 당비대납을 가져올 수 있고, 실질적인 당활동, 당보발간, 당교육을 생각해 보면, 5천 원 이상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민주당 출신들은 당에 자원봉사를 하고, 왕성하게 활동하는 당원들조차도 당비납부에는 너무나 거부반응을 보이기 때문에 당비를 납부하지 않아도 당 봉사활동 등 실적이 있는 당원은 기간당원으로 인정하자는 것이었다. 당비 문제보다도 당원 자격 조건으로 당비납부를 의무화할 것인가? 여부가 치열한 쟁점이 되었다. 이 쟁점의 전개과정은 1편에서 소개했으니 모두가 알고 있을 것이다. 그때, 위원회에서 토의한 것은 당원 자격 조건문제는 나중에 결론을 내기로 하고, 당비를 받는다면 얼마로 할 것인가? 하는 비교적 단순한 문제는 합의하기로 했다. 결국 당비는 개혁당 당비납부의 성공사례와 노무현의 ‘돼지저금통’ 모금의 긍정성이 영향을 미치게 되어 ‘현실적이고 상징적 액수(?)’로 일단 타협하였다. 제출된 안은 1만원, 5천원, 1천원이었다. ‘정예당원’개념에서 ‘100만 당원’으로 개념 전환과 조기숙 교수의 조언, 그리고 호남지역 농촌 지역구를 가진 이강래 의원의 강력한 주장으로 서로 서로 양보하여 타협을 한 결과, 최종적으로 ‘2천원 이상’이 낙찰되었던 것이다.
조기숙 교수의 평가대로 개혁당 측은 중간에 다시 한번 크게 타협을 했어야 했다. 나는 개인적으로 그 시기를 2005년 12월경이라고 생각한다. 이때는 정세균 비상집행위원회 시기다. 연이은 재보궐선거에서 완패를 하자, 지도부와 현역 국회의원들은 ‘기간당원제’를 희생양으로 삼았다. 콩가루 집안에 자충수에 자충수를 거듭하더니 드디어 ‘공천문제’에 손대기 시작했다. 재보궐선거에서 패배한 이유가 ‘국민참여경선’으로 후보를 잘못 뽑아서 아니라, 지도부가 일방적으로 결정한 전략공천의 잘못임에도 불구하고 ‘기간당원제’를 제물로 삼았다. 그 대표적 사례가 천안지역에 공천한 이명수 후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공직후보자 경선제도’에 초점이 맞추어졌을까? 국회의원들이 느끼고 있는 기간당원제에 대한 불만을 이용하여 자신들이 유리한 경선제도를 만드는 기회로 삼았던 것이다. 이들은 2006년 지방선거를 대비한다는 명목으로 ‘국민참여경선’에서 기간당원을 배제하고 ‘여론조사 결과’를 50%까지 도입하자고 이구동성으로 주장했다. 7명이 모이는 당헌개정소위원회에서 2명을 제외한 5명이 강력하게 주장했다. 나는 그때 여론조사를 도입하는 방안에 대해, 타협하지 않으면, 강행처리할 것이라는 예감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여론조사’가 도입될 수밖에 없는 정치적 지형에 주목했다. 기간당원제가 공천제도와 연관성이 아주 높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불가피하다고 생각했다. ‘기간당원제’가 패배의 원인은 분명히 아니지만, 당 내부의 분열의 원인이 되고 있는 점은 분명했다. 극단적 대결이 아니라면, 타협의 필요성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여론조사’라는 제도의 문제점은 있지만, 국회의원들의 이해와 요구를 어느 정도 수용하여 당내 평화와 지방선거 대비를 했으면 했다. 내가 소속되어있는 ‘참여정치실천연대’에서 ‘여론조사 도입’ 문제를 숙고했다. 그러나 결론은 전면 거부였다.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 당내 정치세력으로 경쟁관계에 있었던 ‘국민참여1219(국참)’가 기간당원제 고수를 깃발로 오히려 ‘참정연’을 타협세력으로 공격했기 때문이다. 불필요한 선명성 경쟁이 벌어진 것이다. 소위원회 위원 중에 '국참' 소속이었던 사람은 여론조사 50% 도입에 찬성하는 입장이면서도, 내가 당헌개정소위에서 “여론조사를 20~30% 범위에서 도입한다면 타협해 볼 수 있다”고 토론한 것을 당 게시판에 공개했다. 오히려 나를 포함한 '참정연' 세력을 변절세력으로 몰아가기 시작했다. 또한 중앙위원회에서도 기간당원제 고수를 발언하면서 실질적으로는 기간당원제를 약화시키는 정책에 찬성하는 이율배반의 형태를 보였다. ‘참정연’이 곤욕스런 처지에 빠졌다.
둘째, 정치전문가의 입장에서 ‘여론조사’ 제도 자체의 결합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경선에 여론조사가 도입되는 것은 지극히 한국적 방식(?)이다. 어떤 방식으로 여론조사를 실시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는 것이 여론조사라는 것이 전문가의 소견이다. 또한 한번 도입하기 시작하면 점차 50%이상까지 확대될 것이라는 추측이 있었다. 기간당원제 논쟁에서 싸인 불신이 더욱 깊어져 있었기에 우선 ‘의혹’의 눈길로 볼 수밖에 없었다.
셋째, 기간당원이 참여하는 ‘국민참여경선’을 한번도 실시하지 않고 또다시 제도를 개정한다는 불신이었다. 우리당 당헌 어디에도 터무니없는 ‘기간당원’만의 경선은 없었다. 우리당의 경선은 2가지 방식 중 하나로 선택하여 하기로 되어 있었다. 전(全)기간당원경선제와 국민참여경선제이다. 기간당원 숫자가 유권자의 1% 미만이거나, 1000명 미만이면 전(全)기간당원경선제는 할 수 없도록 되어있다. 이 조건을 충족하면, 국회의원 선거, 광역도지사 선거의 경우는 중앙위원회, 지방자치선거는 도당 상무위원회에서 2가지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호남을 제외하고 기간당원경선제가 진행될 곳은 없었다. 또한 중앙위원회와 상무위원회에서 의결해야 가능했다. 그래서 대체로 국민참여경선제를 실시하도록 제도화되어 있었던 것이다. 국민참여경선제는 기간당원이 30%에서 50%까지 참여할 수 있게 되어 있고, 참여 비율은 중앙위원회, 상무위원회에서 결정하게 되어 있었다.
따라서 ‘기간당원제’에 관한 대타협을 2005년 겨울에 하지 않은 것은 '정치적 판단'이었고 '전략적 선택'이었다. 첫 번째 문제와 연결된 문제의식으로 정치세력의 선명성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이제 와서 타협하여 얻을 것이 많다면 모르지만, 명분도 잃고, 실리도 잃어버리는 결과가 온다고 본 것이다. 이 글이 기간당원제를 기본으로 하는 공천제도를 개정하려는 세력들이 옳았고, 타협하지 않은 개혁세력이 틀렸다는 것으로 오해되지 않기 바란다. 그때는 열린우리당이 분당하는 최악의 경우에도 ‘창당정신’을 사수했다는 명분이 있어야 생존할 수 있다는 정치적 판단이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세균 당의장의 비상집행위원회는 여론조사 방식을 거듭 강행 통과를 시도하여, 결국은 뜻을 이루었다. 또한 지방선거 과정에서는 국회의원들의 자의적 공천이 곳곳에서 이루어졌다.
결과적으로 ‘기간당원제’를 사수했던 개혁세력은 차후에 있었던 열린우리당의 해산과정에서 ‘창당정신’을 사수했다는 명분으로 대타협을 거부한 정치적 자산을 하나도 사용하지 못했다. 당을 사수하지도, 새로운 당을 창당하지도 못하고 대통합민주신당의 대통령 선거에 합류하였다. 대타협을 거부하고 치열하게 ‘기간당원제’ 투쟁하던 ‘참정연’이 오히려 자체 해산을 결의하고 말았다. ‘참정연’에 대한 자세한 평가는 다음 기회에 다시 하겠다.
2. 기간당원제는 어떤 정당모델인가?
당원제도만으로 정당의 특징을 나타내지는 못한다. 이 글에서는 당원제도와 정당모델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살펴보자. 당원제도와 연결된 정당모델은 통상 ‘지지자 중심 정당모델’과 ‘당원 중심 정당모델’이 있다. ‘지지자 중심 정당모델’은 대체로 ‘미국식 정당’을 말한다. ‘지지자 중심 정당모델’은 마치 당원은 없는 것처럼 오해하기도 하는데, 미국의 정당에는 당원들, 엄청난 ‘열성당원들’이 있다. 100년 이상의 정당 역사가 있었기 때문에 당원들의 열성이 대단하다. 미국의 당원들은 선거 때만 되면, 1달씩 휴가를 내서 자원봉사하고, 후원금을 납부한다. 할아버지, 아버지, 아들로 대를 이어 지지하기에 자신의 정당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선거운동이 한창일 때는 지지하는 정당을 표시하는 스티커나 깃발을 창문에 내다 걸기까지 한다.(그래야 귀찮은 다른 당 선거운동원이 찾아오는 일을 막을 수 있다) 이들이야말로 진짜 기간당원들(?)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당원들이다. 기간당원제를 처음에 설계했던 사람들도 이런 당원들을 원했던 것이다. 모든 정당은 당원을 가지고 있다. 미국의 정당도 유럽의 정당도 심지어 동원형 당원제도를 대표하는 ‘3김시대’의 정당도 당원은 있었다. 당 총재가 당원의 권리를 독점하고 있었지만, 당원은 있었다. 열린우리당의 기간당원제는 정당모델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정당을 이루는 최소한의 기초, 열성적인 당원이 필요했던 것이다. 미국의 당원과 열린우리당의 기간당원의 제일 큰 차이점은 공직후보 선출이다. 미국의 정당은 공직후보자 선출을 위한 경선을 국민이 직접 참여하여 치른다. 그 정당에 참여하여 투표하는 국민을 당원으로 분류하여 관리하기도 한다. 만면에 우리당은 국민참여경선제를 선택하여 기간당원은 50%~30%까지 참여할 수 있게 했다. 미국식 경선제도를 중심으로 약간의 당원참여를 보장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우리당의 ‘국민참여경선제’는 한번도 제대로 실시하지 못했다.
한국에도 일부 학자와 정치인들이 미국식 원내정당을 정당개혁의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 영향으로 선거법, 정당법 개정에서 미국식 제도가 도입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한국의 정치현실을 냉정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정당모델도 역사적 과정에서 끝임 없이 변화발전하고 있는 실체이기에 단순하게 비교하기 어렵지만, 미국식 정당 모형과 유럽식 정당 모형의 주요한 특징을 중심으로 비교해 보자.
첫째, 중앙당의 역할과 규율을 살펴보면, 미국은 거의 없거나 느슨한 편이다. 미국은 연방국가의 특징으로 중앙당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다만 전국위원회를 구성하여 대통령 선거 같은 전국적인 선거에서만 그 역할을 하지만, 이때도 대통령후보의 선거캠프가 중심이다. 미국식 대통령제의 특징으로 3권 분립에 기초하여 대통령은 의회를 상대로 정치를 한다. 당연히 국회의원 중심의 원내정치가 활성화되어 원내대표 중심의 원내정당이 된다. 반면에 유럽식은 중앙당 당수가 차기 총리이기 때문에, 정당체제로 총선을 치루고, 당규율 또한 강력하고 분명하다. 내각제이기에 당수 중심의 정당체제가 이루진다.
둘째, 공천제도에서 확연하게 차이가 있다. 미국은 각 주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누구나 참여하는 개방경선(오픈 프라이머리), 소속 당원으로 신청하여야 참여하는 폐쇄경선(클로즈 프라이머리), 당원이나 대의원 자격을 가져야 참여하는 대의원 대회(코커스)가 있다. 대부분의 경우, 국민이 참여하는 경선을 실시하고 있다. 미국의 정당 문화와 유럽의 정당 문화는 여기에서 확연히 나뉘어 진다. 미국의 개방경선은 1930~68년을 거치면서 정당의 보스, 조직가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한 대안이었다. 72년 대선부터 제도가 완전히 정착했다. 또한 개방경선이 가능한 근저에는 철저한 양당제가 정착되어 있기 때문이다. 유럽식은 나라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지구당 대회에서 선출하는 방식이다.
영국에 잠깐 정치연수를 갔을 때, 노동당 원내 부총무를 만나 이것저것을 물어본 적이 있다. 그 사람은 지난 100년 동안 노동당이 계속 당선된 런던의 노동자 밀집지역구에서 2선을 한 사람이었다. 어떻게 경선을 하느냐고 하니까, 동별 추천자를 받다보니 예비후보가 많은 경우에는 50여명에서 시작하기도 한다고 한다. 자신은 섬유노조 위원장 출신이라 다른 경쟁자들을 쉽게 이기긴 했지만, 처음 후보자로 나설 때는 치열했던 모양이었다. 토니 블레어의 전기를 보면, 중앙당에서 후보자들을 각 지구당에 추천하기도 하고, 자천하기도 한다. 반드시 지구당에 설치되어 있는 ‘후보자 심사위원회’에서 과반수의 동의를 통과해야 후보자격이 주어진다. 이때 통과하는 사람은 3~5명 정도 되는 모양이다. 이 복수의 후보를 놓고 지구당 당원대회에서 선출하는 과정이 블레의 전기에 약간 소개되어 있다. 영국은 소선거구제라 지구당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독일은 주별로 정당명부를 먼저 작성하고, 지구당에서 지역구 출마자를 선정하는 과정을 거친다.
열린우리당에서 ‘정당모델을 중심으로 한 당원제도논쟁’은 창당 초기의 과정이 아니라, 2005년 후반기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민주당 개혁특별위원회에서 정당모델에 대해 심도 깊은 토론을 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초점은 당원제도가 아니었다. 이 과정에서 미국식 정당모델의 장점을 주로 검토했던 것은 당의 지도체제와 원내정당 도입문제였다. 그래서 한국적 상황을 반영하여 제왕적 총재를 대신하는 집단지도체제인 ‘중앙위원회’ 제도와 원내정당의 일환으로 정책위원회를 관장하는 ‘원내대표’ 제도가 도입된 것이다. 경선제도에서도 ‘당원경선이 아니라 국민참여경선제’가 선택된 것이다. 미국식과 동시에 유럽식 정당모델을 같이 검토했다. 굳이 정당모델로 이야기하라면 ‘혼합형 정당모델’을 선택했다고 볼 수 있다.
3. 왜 우리당은 정당 모형으로 ‘혼합형’을 선택했을까?
상당히 많은 영역에서 ‘미국식’제도가 도입되었지만, 여전히 한국의 정치체제와 형태는 유럽식에 가깝다. 첫째 강력한 중앙당의 존재로 공천권의 정당독점, 둘째 국회를 중심으로 정당간의 극한 대결, 셋째 헌법에 도입되어있는 내각제적 요소에 따른 국정운영 등이다. 그래서 한국의 정당정치 형태와 정치문화 환경은 유럽식에 가깝다. 당수로 대표되는 중앙당이 선거에서 대결한다. 한국은 총리(또는 수상)가 대통령이란 이름만 바뀐 체, 정당과 정당이 대결하는 선거문화를 가지고 있다. 한국 정당법의 기본도 유럽식에 기초하여 재정되었다.
한국의 정당들은 유럽식의 정당 모형에서 특히 ‘민주성’이 없는 3김식 정치가 적용되면서 1인 사당화의 길을 걸었다. 유럽에는 없는 제왕적 총재가 등장한 것이다. 박정희 독제체제의 유산과 함께 30년 넘게 패권정당체제가 계속되었다. 자연히 정당은 국민들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불신의 대상이 된 것이다. 즉 사당화는 당심과 민심의 불일치를 가져오게 되어 있었다. 3김의 영향력을 제거하는 데는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먼저 시작한 것이 공천제도의 변경이었던 것이다. 근본문제를 해결하려는 방법보다 기술적인 방법으로 접근한 것이다. 2002년 새천년민주당에서 실시한 국민참여경선제도는 우리나라 정당정치에서 정당 자체를 민주화하기보다도(시간이 많이 걸리고 힘들기 때문에) 우선 간단한 공천제도를 먼저 개혁함으로써 효과를 본 대표적인 표본이다.
열린우리당은 정치개혁, 정당개혁을 모토로 탄생한 정당이다. 확실하게 기존정당과 달랐다. 중앙당에는 격렬한 정당대결을 부추기는 ‘대변인 제도’를 개혁하기위해 ‘공보실 체제’로 전환하고, 누구나 대변인 역할을 자임할 수 있도록 했다. 대신 원내에 ‘대변인’ 제도를 두었지만, 스스로 정치쟁점을 생산하는 국회의원들이 없자, 공보실의 역활에 불만이 쏟아졌다. 또한 누군가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주는 기존 관행에 익숙한 기자들의 빗발치는 요구에 결국은 무너지기 시작했다. 대통령의 당 지배와 공천권을 실질적으로 장악하는 ‘사무총장’제도를 당을 관리 운영하는 체제인 ‘사무차장’으로 바꾸고, 원내로 정책위원회를 이동하는 과감한 조치를 취했지만 야당에 격을 맞추어야 한다는 이유로 사무총장으로 부활하고, 원내로 이동한 정책위원회는 원내대표와 당의장의 권력투쟁의 한 형식이 되었다. 이렇게 6개월을 못가서 하나씩 복귀되기 시작했다. 정치체제와 문화가 아직은 성숙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기희생의 각오로 과감하게 선택한 제도였지만, 지지율 하락이라는 단기적 흐름에 너무나 민감하게 반응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국민들이 진정성을 알아줄 것이라는 믿음으로 추진했지만, 기존의 관행에 익숙한 중진들은 야당의 극한적 저항에 제대로 대항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고정적인 ‘대변인’제도를 서둘러 부활시켰다. 정당개혁의 장기적 관점과 전략적 인내심이 부족했다.
우리당은 2003년 창당과 2004년 총선과정에서 ‘선거연합정당’의 성격을 가지고 탄생한 당이었다. 따라서 근본적으로 ‘짬뽕정당’ ‘잡탕정당’으로 불릴 정도로 당선된 국회의원의 성향도 천차만별이었다. 거듭되는 당의장의 교체로 당 지도력이 취약해지면서 108명이나 되는 초선의원에 대해 지도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당의장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위원회’는 당의장과 당중진들의 과거의 관행과 견제 때문에, 제왕적 총재가 부재한 상황에 대한 새로운 지도체제로 자리를 잡지못하고 좌충우돌하기만 하고 정치의 중심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우리당의 당원제도는 겉으로 보기에는 유럽식 정당 모형을 기본으로 ‘당원제도’를 설계한 것처럼 보인다. 제왕적 총제체제인 1인 사당화를 빨리 벗어나는 제도개혁의 핵심을 당의 뿌리인 당원, 건강한 당원을 양성하는 것에 두었다. 선거과정에서 자발적 당비납부가 가능하다는 확신이 있었다. 열린우리당의 비극 중에 하나는 어쩌면 기간당원제를 실시하기로 하면서, 동시에 ‘원내 정책정당화’라고 불렸던 ‘원내 정당’ 추진을 함께 했던 것에서 비록된 것일지도 모른다. 그때까지 원내정당이 될 수 있는 정치문화도 없고, 정치체제도 아니고 기본 토대가 없는 여건에서 선도적으로 원내정당으로 이동하다보니 강력한 야당의 격렬한 저항을 뚫지 못했다. 정당체제의 중심을 정확하게 잡지 않은 상태에서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달려가다 보니 끊임없이 흔들려버렸다. 우리당의 경우, 기간당원제의 문제뿐만 아니라 창당의 정신과 초기 개혁조치들이 후퇴하면서 다른 정당과의 차별성이 없어졌다. 정당개혁만 놓고 보면, 도낀 개낀이 되어버렸다. 한국적 상황이기도 했고, ‘한국형’ 또는 ‘혼합형’의 비극이기도 했다.
4. 기간당원제도 유감(?)
앞에서 살펴보았지만, 기간당원제도는 중간에 당의장 선출과정에서도 크게 충돌했지만, 결국 2006년 지방선거 공천제도에서 첨예하게 충돌했다. 돌이켜 보면, 2003년 민주당 개혁안도 결국은 제왕적 지구당위원장 제도와 맞물리는 총선 후보자 문제 때문에 개혁안이 좌절된 것이다. 사실상 2004년 총선 때문이었다. 총선 후보자격을 얻는 과정에 대해 불리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민주당에 잔류했다. 그만큼 한국정당에서 후보선출 문제는 분당도 각오하는 치열한 문제였다. 그러고 보면, 열린우리당도 필연적으로 거칠 수밖에 없는 공천제도 후유증을 앓은 셈이다. 1편에서 한 이야기이지만, 만약에 열린우리당에서 2004년 후보선출과정에서 비록 모집되었지만, 당원을 50% 참여시키는 경선을 실시했더라면, 조기 정착의 가능성이 있었지 않았을까하는 아쉬움을 다시 한번 느낀다.
민주화 20년이 지난 현재의 시점에서도 변하지 않는 대한민국 정치의 큰 현상 중에 하나는 ‘지역주의에 기초한 정당정치’이다. 또 하나는 ‘국회에서 벌어지는 극단적 대결정치’다. 이 2개의 현상 중에서 ‘지역주의’에 관한 것은 다음 기회에 토론하겠다. 작년 8월에 개최한 사회디자인연구소 창립 심포지엄에서 ‘새로운 정치를 위한 소고’에서 한국 정치에서 지역주의의 근거 토대와 선거에서의 영향에 대해 발제한 적이 있기에 오늘은 생략하기로 한다. 또 다른 문제인 ‘극단적 대결정치’에 주목해 보자. 얼마 전, 2009년 1월 6일까지 대한민국 국회는 전쟁터였다. ‘국회폭력 어떻게 방지할 것인가?’를 주제로 KBS 심야토론이 있었다. 토론 중간에 미국에서 하원의원을 지낸 ‘김창준’씨를 전화 연결하여 폭력을 방지하는 방법에 대해 질문하자 다음과 같이 답변했다.
“미국에서는 절대 없는 일이다. 국회의원의 공천을 중앙당이 하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다. 중앙당이 무슨 권한으로 공천을 하는가? 미국처럼 국민이 공천하면, 국회의 폭력적 대결은 없어질 것이다. 중앙당이 공천을 하니까 국민을 보는 것이 아니라 당지도부를 보고 정치하는 것이다. 국민의 공천으로 후보자를 선출하면, 폭력을 쓰는 정치인은 국민의 심판을 받을 것이고 그러면 국회 폭력은 없어진다. 한국도 하루 빨리 오픈 프라이머리를 도입해서 국회 폭력이 없어지길 바란다.”
현재, 국회에서 극한대결로 나타나는 폭력(?)사태의 원인은 여러 차원에서 발생하고 있다. 헌법을 포함한 정치체제의 문제로 접근하기도 하고, 후보자 선출제도를 포함한 정당법 문제로 접근하기도 하고, 국회법 등 운영의 규칙으로 접근하기도 한다. 이처럼 하나의 현상은 하나의 원인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복합적이고 중층적이다. 기간당원제의 문제도 마찬가지다. 지금 검토하고 있는 ‘기간당원제도’가 언제 규정된 제도인지 불분명할 정도로 내용은 수없이 수정되었다. 논쟁의 초점도 그때마다 달라지고, 개선점도 달랐다. 솔직히 개선하기보다도 ‘더 이상 나빠지지 않게 막아내는 일’에 급급했다. 나와 정세균 당의장과 언쟁을 벌릴 때, 참으로 무참했다. 당의장은 “문제점을 개혁하겠다는데 이렇게 막는 법이 어디 있어요!”라고 했고, 나는 “세상에 바꾸면 다 개혁입니까? 개악은 없나요?”라고 맞고함으로 대꾸했다. 한동안 자괴감에 몸을 떨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내가 어느새 개혁파가 아니라 지키는 수구파(?)로 굴욕을 감수해야했다.
한번도 제대로 시행하지도 못한 ‘기간당원제’가 아니라, 당의 발전에 발목을 잡고 있는 거머리 같은 ‘기간당원제’가 되어 있었고, 기간당원제가 오히려 ‘동원형 당원제’가 되어있었고, ‘당비 대납’의 구시대 정치의 유물이 되어 있었다. 그래도 정치세력으로 가지고 가야할 명분으로 나는 기간당원제를 선택했다. 그래서 2007년 마지막 중앙위원회에서 창피함을 무릅쓰고 63명의 중앙위원 중에 유일한 기간당원제 사수를 선택한 것이다.
이제는 21세기형 ‘진보정당’, 집권 가능한 ‘진보정당’을 창당하기 위해 ‘새로운 당원제도’를 정립해야할 때다. 한국정당 역사에서 열린우리당의 기간당원제도는 제대로 안착하지 못하고 실패하고 말았다. ‘민주노동당’은 계급에 기초한 대중정당으로써 자신의 몸에 맞는 진성당원제를 정착시켰다. 한나라당마저도 ‘책임당원제’라는 당직자에게 할당된 당원제도를 안착시켰다. 정말 닭짓만 하지 않았더라면, 한국형 모범정당의 뿌리가 만들어졌을 것이라는 부러움이 앞설 따름이다.
다음 3편에서는 지난날의 실패를 교훈으로 한국의 실정에 맞고, 정당의 철학과 이념, 가치에 맞는 새로운 당원제도는 무엇일까? 한편에서는 대중 참여의 꽃이 피었던 ‘촛불’이 있었고, 다른 한편에서는 거대정당의 몰락이 있었다. 웹2.0과 인터넷과 모바일이 정치의 기본 수단이 되는 시대에 새로운 당원모델은 무엇인가? 살펴보기로 하자!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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